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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찰밥

by 홍생


늦은 밤, 어머니 전화다. “네 동생이 호박을 가지고 왔길래, 호박죽 끓여놨다. 낼 올래?” 아마도 나의 방문이 최근에 좀 뜸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아들을 보고 싶어 하는 방식은 늘 이런 식이다. 미안하기도 하고 계면쩍기도 해서, “아이고, 뭐 하러 그런 걸 해요? 한 그릇 뚝딱 사 먹으면 되는걸.”이라고 얼버무린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시는 것은 다 맛있고 좋다. 하긴 어머니 밥을 먹고 컸으니 당연하기도 하다. 그래도 요즘엔 “허리야, 어깨야, 무릎이야!” 하시면서 이곳저곳 통증을 호소하시는 어머니를 볼라치면 괜히 안쓰럽다. 그래서 자식들을 위해서 음식 만드시는 것을 말리기도 한다. 그래도 기다려지는 음식은 호박죽과 오곡밥(찰밥)이다. 갖가지 재료가 듬뿍 들어간 찰진 밥은 반찬이 없어도 그만이다. 이미 준비하는 손길 속에 온갖 영양분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정월대보름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온다. 그래서 더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용재총화』에 약밥(찰밥 또는 오곡밥)의 유래에 관한 글이 있다.

신라왕(新羅王)이 정월 15일에 천천정(天泉亭)에 거둥하였더니, 까마귀가 은(銀)으로 만든 함을 왕 앞에 물어다 놓았는데, 함 속에는 글이 쓰여 있되 단단히 봉해져 있었고, 그 겉면에 쓰이기를,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두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이 낫다.” 하시자, 대신이 의논하기를, “그렇지 않사옵니다. 한 사람이란 임금을 말하는 것이옵고, 두 사람이란 신하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하여, 드디어 열어보았더니, 그 속에는 “궁중의 거문고 갑(匣)을 쏘라.”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말을 달려 궁으로 들어가 거문고 갑을 보고 활을 힘껏 당겨서 쏘니, 갑 속에 사람이 있었다. 이는 바로 내원(內院)의 번수승(樊脩僧)이 왕비(王妃)와 사통하여 왕을 죽이려고 그 시기를 미리 정하였던 것인데, 왕비와 중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왕은 까마귀의 은혜를 생각하여 해마다 이날에는 향반(香飯)을 만들어 까마귀를 먹였는데, 지금까지도 이를 지켜 명절의 아름다운 음식으로 삼고 있다. 그 만드는 법은 찹쌀을 쪄서 밥을 짓고, 곶감ㆍ마른 밤ㆍ대추ㆍ마른 고사리ㆍ오족용(烏足茸)을 가늘게 썰어서 맑은 꿀과 맑은 장(醬)을 섞어 다시 찐 다음 다시 잣과 호두 열매를 넣어 만드는데, 그 맛이 매우 좋아 이를 약밥[藥飯]이라 한다. 속언에는, “약밥은 까마귀가 일어나기 전에 먹어야 한다.” 하였으니 대체로 천천정(天泉亭)의 고사(故事)에서 연유한 것이다. <출처: 한국고전종합DB>


재미있는 이야기다. 까마귀가 은으로 만든 함을 왕 앞에 물어다 놓는 장면부터가 신비롭다. 우리는 흔히 까마귀를 길하지 못한 흉조로 여기는데, 그런 까마귀가 은으로 된 함을 가지고 오는 형국이니 필시 죽음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겠다. 문학적 장치가 있다는 말이다. 거기다가 더욱 왕이 존경스러워지는 장면이 있다. 왕은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는다.”라는 글을 보고는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것이 낫다고 한다. 그러자 신하들은 또, 이구동성으로 한 사람은 바로 ‘왕’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열어보자고 한다. 왕은 백성을 생각하고, 신하들은 왕을 생각하는 마음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뒷이야기는 보나 마나 왕이 살아나고, 악인이 처벌받는다는 이야기를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까마귀는 알고 보면 신하 중 한 명일 가능성이 있다. 이야기에서는 까마귀라고 했으나, 아마도 왕을 걱정한 신하의 고변을 왕이 귀담아들었지 싶다. 이후의 이야기가 더 즐겁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까마귀를 위해서 향기 나는 먹을거리(香飯)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꿀과 함께 각종 재료를 넣어 윤기 나는 약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주었다고 하니 자연사랑도 보인다.


주로 정월대보름에 먹는 약밥의 유래에 관한 글이다. 우리 선조들은 한 해가 무사하기를 기원하면서 약밥을 만들어 먹었다. 변란에, 돌림병에, 보릿고개에 시달렸지만, 저승사자 격인 까마귀를 대동하여 신비로운 이야기를 짓고 한 해의 무탈함을 기원했다고 하니 약밥(오곡밥)을 먹는 것이 새삼스럽다. 오곡밥이라고 해서 꼭 다섯 가지 곡식만 들어간 것이 아니라, 오곡이 좋은 영양소를 뜻하기도 하고, 까마귀 오(烏)자를 빌린 단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올해도 오곡밥을 먹을 생각을 하니 설렌다. 몇 해나 더 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윤기가 번지르르하게 흐르는 팥이 듬뿍 들어간 찰밥을 만드시는 어머니를 오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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