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죽기 살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말이 있다. 궁지에 몰리면 죽기로 작정하고 덤빈다는 말이다. 그런데 까무러치기는 왠지 회피하는 말처럼 들린다. 관심 끄고 그냥 죽은 듯 있겠다는 표현이라서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로도 들린다. 토요일 오후에 별일이 없으면 소파에 죽치고 앉아 티브이 리모컨을 돌린다. 무료한 오후다.
『청성잡기』 제3권에 호랑이와 백성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산골 백성이 산에 들어갔다가 호랑이를 만났는데, 재빠르게 높은 나무로 올라가서 피하자, 호랑이는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떠나지 않았다. 산골 백성은 호랑이의 습성이 겁을 주면 달아나는 것임을 평소 잘 알고 있었으므로 나뭇가지를 꺾어 아래로 던졌는데, 호랑이는 그때마다 그것을 가져다가 깔고 앉았다. 백성은 곧 솜을 뽑아서 던졌는데 호랑이는 더욱 익숙한 솜씨로 그것을 가져다 깔고 앉았다. 이번엔 부싯돌을 쳐서 불을 내어 솜에 싸서 호랑이 앞에 던지자, 호랑이는 대번에 가져다가 깔고 앉고는 눈을 부릅뜨고 위로 노려보면서 땅 가득히 침을 흘리니 기어이 잡아먹고야 말겠다는 태세였다. 조금 있자 조그만 불꽃이 꽁무니에서 타올랐고 온몸에 바람이 일어 한순간에 타오르니, 호랑이는 기겁하고 눈도 못 뜬 채 뛰다가 언덕으로 굴러떨어졌다. 백성이 천천히 나무에서 내려와 계곡을 따라가 보니, 백 걸음도 안 되는 곳에 죽은 호랑이가 쓰러져 있었다. 백성은 놀라는 한편 웃으며 말하였다.
"처음에는 놀라게 해서 쫓아 버려 죽음을 면하려고 하였는데, 그 불꽃이 호랑이를 죽게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라는 속담에 꼭 알맞은 이야기이다. 배고픈 호랑이를 만난 나무꾼이 나무 위로 올라갔다가 호랑이에게 겁을 주려고 하다가 되려 호랑이를 잡은 이야기다. 나무꾼의 지혜가 돋보이기도 한다. 산골 백성이 산에 들어가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그곳이 자신의 일터이기 때문이다. 호랑이에게도 자신의 삶터가 산골이다. 서로가 영역을 두고 다투기 마련이다. 산골 백성에게는 나무가 필요하고 호랑이에게는 먹을 것이 필요하다. 서로 할 일만 하면 되겠지만, 그 영역이 공교롭게도 겹치는 구간이 있다. 그런 곳에서는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난다. 잘못하다간 죽을 고비를 맞기도 한다.
이 이야기의 승자는 나무꾼이다. 나무꾼과 호랑이의 행동을 비교해 보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호랑이는 다 잡은 먹이라 생각하며 느긋하고 안일하게 대처한다. 나무꾼이 나무에서 내려올 때까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저 내려올 때를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나무꾼은 다르다. 살기 위해서 온갖 방도를 생각하고 실천에 옮긴다. 누가 승자가 될지는 뻔하지 않은가? 죽기 살기로 마음먹고 덤비는 자는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그런데, 죽기 살기로 매일 살아야 할 형편이라면, 혹은, 매일 까무러치기로 산다면 그것도 무서운 일이다.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지 싶다. 티브이 프로그램 <동행>을 보면 죽기 살기로 버티는 사람들이 종종 보이는데 그들에게는 관심이 최고의 버팀목이다. 도움을 주는 사람들의 손길을 보면, 늘 소파에다가 까무러치기를 전공으로 하는 나도 '아이고야!' 하면서 벌떡 일어나 앉을 때가 많다. 아내가 최고의 드라마라고 하는 이유를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