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에 관한 명상

by 홍생

신혼 때부터 고요한 적 없었던 세탁기가

오늘도 띠리리리리

나 다 됐어요 합니다


한숨처럼 늘어진 주름치마

하이힐에 탑승했던 나팔바지

풀물 밴 교복을 걷고

방금 들어낸

표백된 어제의 일들과

뚜벅뚜벅 걸어온 길들을 널어봅니다


종일토록 꽃가루 미세먼지 묻었던 것들

그래도 다시 그 햇볕에 그 바람에 말리면

어제 노상에서 젖었던 바지 밑단도

막차처럼 가슴 졸였던 허리도

꾸깃꾸깃 접혔던 소매의 주름들도

다시 바싹 마르는데


더러운 얼룩이 어지간해도

풀풀풀 세제 넣고 돌리면

텅텅거리고 뒤엉켜도

살살 잘 흘러가고 술술 뚫리는 걸 봅니다


오후 두 시의 햇살에 기죽은 것들

반듯해지고 단정해집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