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녀와 비형랑
근무하는 직장에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이 몇 있다. 평상시에는 데면데면하다가도 어떤 불리한 상황이 발생하면 서로 몇 기냐고 물으며 아웅다웅한다. 곁에서 보면 정말 사소한 일인데도 쩨쩨하게 기수를 따지는 걸 보면 대한민국 최고의 부대인 해병대 출신이 맞는지 궁금하다가도 금방 다시 화해하고 즐겁게 지내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다. 또한, 일을 겁내지 않고 해병대의 팔각모처럼 각이 잡힌 행동을 할 때는 정말로 귀신이 두려워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삼국유사』에 「도화녀와 비형랑」 편이 있다. 등장인물은 신라의 제25대 진지 대왕이다. 진지 대왕은 진흥왕의 셋째 아들이다. 이야기를 읽어 보면, 미녀에게 약했던 왕이 그만 신하의 아내인 도화녀에게 빠져버렸다. 그래서 도화녀를 궁궐로 불렀다. 그런데 도화녀는 남편이 있다면서 수청들기를 거절한다. 왕이 “남편이 없다면 수청을 들겠느냐?”라고 묻자, 그렇게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진지 대왕은 꿈을 이루기도 전에 죽었고, 두 해 후에 도화녀의 남편도 죽었다. 그러자 죽은 진지 대왕이 살아나서 도화녀 앞에 턱하고 모습을 보인다. 둘은 사랑을 나누고 그 결실로 비형랑이 태어난다. 비형랑이 똑똑하다고 소문이 났고 진지 대왕의 조카였던 제26대 진평 대왕은 비형랑을 집사로 임명했다. 밤마다 비형랑이 담을 넘어가서 귀신과 논다는 소문을 들은 왕은 비형랑에게 귀신 중에 똑똑한 자를 천거하라고 한다. 비형랑은 길달을 천거하고 그는 충신이 되었다. 하지만 나중에 여우로 변한 길달은 비형랑에게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로 귀신들은 비형랑을 두려워했다.
참 황당하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다. 실제로 진지왕이나 진평왕이 존재했던 인물이라서 이야기의 신빙성이 있고 꼭 그랬던 것 같기만 하다. 그런데 귀신이 된 임금이 부활해서 산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믿을 사람은 하나도 없다. 뿐인가, 귀신(진지대왕)의 아들(비형랑)은 귀신일 뿐인데, 귀신(비형랑)이 귀신(길달)을 천거하여 충신이 되고 그 충신이 다시 여우로 변신한다는 터무니없는 설정이 재미를 더 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과정이 왜 그런지 알기 위해서는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살펴보아야 한다. 삼국유사는 있었던 사실을 기록한 유사(有史)가 아니라 그냥 나라에 돌아다니던 일을 남긴(遺事) 책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온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지금이야 DNA 검사를 한다면 비형랑이 진짜 진지왕의 아들인지, 진평왕의 사촌인지 알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기술이 없으니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를 가지고 진실이니 아니니 따지고 들면, 더 무슨 이야기가 진행되겠는가? 그러니 옛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 시절의 사람들이나 저자가 생각하고 느낀 바라고 여기는 것이 옳은 일이지 싶다.
귀신들을 불러서 집사라는 벼슬을 주는 진평왕의 처지를 보자. 왕이 정사를 돌보는데 도무지 믿을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니 신통방통한 귀신을 불러서 집사로 삼았지 싶다. 게다가 진지왕과 진평왕이 삼촌과 조카 사이였다면 비형랑과 진평왕은 서로 사촌 형제의 촌수가 된다. 이런 측면에서는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교훈이 딱 들어맞는 이야기다. 여우가 되어서 왕을 배신한 길달을 죽이는 비형랑은 그래도 피가 섞인 사촌 형의 편을 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죽은 진지왕이 산 사람인 도화녀 앞에 나타나는 장면이다. 실제로 왕이라면 마음대로 권세를 휘두르는 자리니 도화녀를 강제해서 잠자리에 들일 수 있었지만, 지아비를 둔 도화녀를 돌아가게 한 뒤 죽은 후에야 그 사랑을 이룬다. 신라는 진골과 성골이 엄연히 존재했고 자신의 의도와는 관계없는 정략결혼의 시대였다. 사랑이 없는 결혼으로 진지왕은 그저 몸 사랑을 나누었을 뿐인데, 도화녀를 보고 그만 진정 사랑에 빠진 것이었다. 도화녀의 말을 들어주는 장면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고 싶은 마음에 취했던 행동이 아니었을까? 후일 도화녀의 남편이 죽자, 귀신이 되어서 산자 앞에 나타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을 보면 간절한 사랑의 결실이 아닌가. 그런 사랑의 힘이 비형랑이라는 귀신도 두려워하는 인물을 낳은 형국이니 사랑의 힘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문다.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들도 집에서 오는 전화를 받고는 매우 공손해지고 쩔쩔매는 걸 보면 사랑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사람 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