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기획
2020년, 글로벌 의류 브랜드 그룹 VF코퍼레이션은 스트리트웨어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슈프림(Supreme)을 약 21억 달러에 인수했다. 당시 VF는 이미 노스페이스, 반스, 팀버랜드 등 유명 브랜드를 보유한 거대 기업이었다. 슈프림까지 품에 안으며, "스트리트 럭셔리"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려는 포석이었다.
하지만 3년 뒤, VF는 약 7억 달러에 이르는 손상차손을 인식했고, 2024년에는 슈프림을 약 15억 달러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인수 후 불과 몇 년 만에 브랜드 가치는 급락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슈프림의 성장 비결은 단순한 디자인이 아니었다. 핵심은 '드롭(Drop)' 전략. 매주 목요일마다 한정판 제품을 소량만 출시하고, 이를 줄 서서 구매하게 하는 방식이다. 판매 자체가 일종의 이벤트였고, 소비자는 "선택받은 소비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슈프림은 수많은 브랜드들과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면서 희소성에 '문화적 권위'를 더했다.
노스페이스, 루이비통, 나이키, 렉서스, 브룩스 등과의 협업 제품은 정가의 5배, 많게는 10배 이상의 리셀가를 기록했다.
제품의 디자인이 평범하더라도, 슈프림 로고 하나가 붙는 순간 희소성과 상징성이 더해지며 가치가 폭등했다.
즉, 슈프림은 단지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브랜드가 가진 정체성과 그것을 소유하는 경험 자체를 판매했다. 이 같은 구조는 리셀러 커뮤니티를 브랜드 생태계로 편입시키는 효과를 만들었다. 리셀러가 많아질수록 제품의 희소성과 시장가치는 더 상승했고, 이는 다시 소비자의 소유 욕구를 자극하는 순환 고리를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슈프림은 단순한 패션 브랜드가 아니라, 희소성이라는 감정적 가치를 실물경제로 전환시킨 브랜드였다. 고객은 단지 제품을 산 것이 아니라, 슈프림이라는 ‘희소성 구조’에 참여한 것이었다. 그 참여 자체가 구매 경험을 강화했고, 브랜드의 상징적 가치를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
VF가 슈프림을 인수한 이유는 명확했다.
스트리트 럭셔리 시장의 주도권 확보
기존의 노스페이스, 반스는 대중적인 캐주얼 브랜드
슈프림을 통해 젊은 세대 중심의 고가 브랜드를 확보하고자 함
D2C 기반 고수익 모델 확보 <- 슈프림은 자사 채널 중심의 판매 구조를 가짐
유통 마진이 없고, 리셀까지 포함해 소비자가 브랜드에 몰입하는 구조
중국 및 아시아 시장 확장
기존 VF 브랜드보다 슈프림이 훨씬 더 감성적 영향력이 컸음
인수 직후부터 아시아 매장 확대, 중국 진출을 시도
즉, VF는 슈프림을 통해 단순히 하나의 브랜드를 산 게 아니라, 브랜드 X 커뮤니티 X D2C X 프리미엄이라는 새로운 시장 공식을 사들이려한 셈이다.
문제는 이 전략이 브랜드의 핵심 가치와 충돌했다는 점이다.
VF는 매출 확대를 위해 제품 공급량을 늘리고, 더 많은 매장과 채널에서 슈프림을 노출시켰다. 드롭 전략도 예측 가능해졌고, 한정판의 '한정성'이 흐려졌다.
결국 슈프림은 더 많이 팔기 위해 '덜 갖고 싶은 브랜드'가 되었다.
팬덤은 이탈했고,
리셀 시장도 식었으며,
브랜드는 '유니크함'을 잃었다.
VF의 운영 전략은 슈프림의 비즈니스 모델—희소성과 반(反)메인스트림 감성—과 맞지 않았다. 브랜드는 팔리는 순간 힘을 얻는 게 아니라, "갖기 어려울 때 더 원해지는 구조"를 유지해야 했다.
슈프림은 단순히 고가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 경험 자체가 핵심 자산인 브랜드였다. 하지만 VF는 슈프림을 노스페이스처럼 운영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브랜드의 태도와 정체성이 무너졌다.
이는 단지 브랜드 운영의 실패가 아니라, 브랜드 전략에 대한 오해였다.
-> VF는 브랜드의 물리적 자산(제품, 매장, 채널)은 샀지만, 브랜드의 감성 자산(희소성, 태도, 커뮤니티 문화)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 결과, VF는 2024년 슈프림을 결국 약 15억 달러에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인수 가격(약 21억 달러) 대비 약 6억 달러의 손실이며, 이는 단순한 수익률 하락이 아니라 브랜드 정체성 붕괴로 인한 가치 손상이다.
브랜드는 숫자보다 감성의 총합이다. 그 감성을 놓치는 순간, 아무리 시스템이 정교해도 브랜드는 무너진다.
VF는 슈프림을 통해 스트리트 럭셔리 시장에 진입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시장은 단지 '비싼 스트리트 패션'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희소성과 태도를 기반으로 한, 감성적 브랜드 자산이 축적되는 곳이었다.
효율성과 유통 확장만으로는 그 감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브랜드는 성장으로 무너졌다.
브랜드는 단순히 이름이나 제품이 아니라, 수년간 축적된 상징과 감정, 태도의 총합이다. 이 정체성을 바꾸는 순간, 소비자가 브랜드에 기대하던 의미도 함께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