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란 무엇일까, 예술은 여타 다른 장르에 비해 유독 정답이 없다는 인상을 준다. 정답이 없음은 불확실성과 모호함의 연속이기도 하면서, 정답으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어준다. 하지만 이 예술마저도 영원한 안식처가 될 수는 없나 보다. 인간은 혼란스럽고 복합적인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비교적 고정적인 자아를 만들고, 그 자아상을 기반으로 세상과 관계한다. 인간은 늘 최소한의 변하지 않는 고정적 특성, 불변을 갈망하지는 않을까 싶다. 이 불변함과 확실성은 안정감이자 또 다른 안식처가 된다. 우리는 늘 양극단의 긴장 속에서 나아가는 존재다.
최근 반강제로 어떠한 공연을 보았다. 배경이 되는 음악을 발판 삼아 퍼져 나오는 연주자의 목소리는 일상에서는 결코 들어볼 일 없는 장르였다. “이것이 도대체 왜 예술 작품이지?”라는 물음을 자아내는 현대 미술과도 같이 이해하기엔 난해하고 감상하기엔 때로 소음처럼 들려오는 음악에 머리가 아팠다 진짜로 두통이 생기고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 난해하고 어지러운 음악에 몰입해 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고 난 그들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역시 예술에는 정답이 없나 보다. 일단 유명해지면 똥을 싸더라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물론 모두가 그 공연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함께 일하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 모두가 난해함을 표현했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사람들 속에서도 불만이 들렸다. 이처럼 서로 충돌하는 감상과 의견들 속에서 예술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이 피어났다. “난 예술적인 사람일까?” 나도 가끔 잊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난 예술대학을 졸업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막연히 예술에 대한 동경이 있었고, 그 동경심 하나로 성적에 맞는 예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사진을 업으로 살아가기도 했다. 죽도록 사진을 하고 싶거나 좋아하진 않았다.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예술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수단 중 하나로 사진을 선택했다. 개인적으로는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음악을 시작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았고, 그림을 그리기에는 재능이 없었다. 여러 예술 장르 중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이 사진이었다. 하지만 사진 또한 정답이라는 고정된 틀에 갇혔다는 현실에 싫증을 느꼈다. 상업 사진에는 정해진 매뉴얼이 있었고,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든 행복한 모습으로 꾸며야 했다. 무엇보다도 억지로 미소 짓게 만들기 위해 피상적인 대화와 농담을 주고받는 시간에 질렸다. 이렇게 돌아보니 나에게 예술은 정해진 틀에 갇히지 않는 모호함과 불확실성이었고 이를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사진이 좋았던 이유 중 하나는 사진이라는 수단을 통해 타인과 관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의 모습은 나의 신원을 보장했고 타인에게 다가가기에 용이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 나는 사진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는데, 이를 반대로 말하면 관계에 대한 결핍을 사진이라는 수단을 통해 보상했던 것이다. (생각해 보니 지금 공부하고 있는 상담 또한 내담자와 상담이라는 목적 아래 일정 시간을 공유하게 된다. 나는 쭉 관계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나의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강력한 권위에 쾌감을 느꼈다. 예술에 정답이 없다는 말은 내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에 제약이 없다는 것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빨강은 남들이 지각하는 빨강이 아니라는 반항심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현대 예술이 대중들에게 쉽게 공감을 받지 못하듯 나의 심오할 수 있는 세계는 오직 나만의 세계에 갇히게 만들었다. 나의 예술적 철학이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사진 분야에서 유명해질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대중이 선호하는 모습을 담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는 곧 모호함과 불확실성으로부터의 도피였다. 타인의 수용과 고유한 존재의 실현의 갈등 속에서 난 타인을 선택했고 사진에 대한 열정은 점차 변질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예전처럼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모든 것을 담으려 노력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촬영은 임금을 받고 진행하는 웨딩촬영이며, 사진은 존재의 실현에서 나의 자존감과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 지점은 늘 아쉽다. 그 시절의 용기와 열정을 쉽사리 느낄 수 없는 변질된 나의 모습이 때론 너무나도 나약해 보인다. 아마 이러한 나약함을 감추기 위해 철학과 상담을 공부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인간 존재의 갈등을 느꼈다. 개인의 자유와 존재를 실현하기 위해 아무런 제약도 없는 무한한 가능성에 자신을 던지지만 그 모호함과 불확실성을 안고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은 극 소수인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방향을 틀어 동질적이고 편안하고 확실한 것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그 난해하고 어려운 공연을 이어간 그 예술가가 더욱더 존경스럽다.
난 지금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일까? 내가 대중적인 정신분석이나 인지치료 같은 상담 이론을 주 이론으로 내세우지 않는 것은 또다시 나의 온전함을 되찾고자 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니 인간은 참 불안정하다. 어떤 하나의 특성에 고정되길 원하면서도 저항한다. 이 불안정함에 무너지지 않으려 타인과 관계를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또 다른 물음이 피어난다. 어쩌면 예술은 꼭 예체능에 국한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삶을 살아가는 각자의 방식이 모두 예술이고, 예술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려는 것은 아닐까? 삶엔 정답이 없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린 타인을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