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왕국의 몰락 과정
나하에서 볼만한 역사 유적지는 단연코 슈리성(首里城)이다. 류큐 왕국의 흔적이 남은 곳. 그러나 이 성은 2차 세계 대전 때 모두 무너졌었다. 슈리성 부근에 진을 친 일본군을 향해 미군의 함포 사격은 불을 뿜었고 일본군과 함께 슈리성은 초토화되었다.
이 폐허는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가 1992년에 와서야 재건되었다. 그리고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관광객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으니 류큐 왕국의 영광과 근대의 비극을 함께 안고 있는 유적지다.
슈리성의 성곽길
슈리성 오르는 길
이곳은 류큐 왕국을 연 중산(中山) 왕의 근거지였다. 웅장한 성곽을 따라 난 언덕길을 오르다 보면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것만 같다. 성문을 통과하면 ‘시사’가 맞이하고 옛날 오키나와 귀족의 복장을 한 이들이 반겨준다.
입구를 통과해 올라가면 큰 광장이 나오는데 우나(御庭)다. 새해 축제를 벌이거나 중국 사신을 맞는 행사를 벌이던 곳으로 큰 광장이다. 축제를 벌이거나 중국의 사신을 맞을 때면 류큐의 신하들이 양쪽에 도열했을 것이다. 중앙의 길은 왕과 중국 사신만이 이용할 수 있었고 중국 사신은 류큐 국왕 책봉식에 때, ‘그대를 류큐 국왕에 봉한다’라는 황제의 말을 중국어로 읽었다고 하니 일본에 합병당하기 전까지 류큐에게 중국은 대단한 존재였다.
광장 끝에는 경복궁의 근정전 같은 세이덴(正殿)이 있고 건물 앞에는 용이 새겨진 기둥이 있다. 그 앞에는 원래 1458년에 주조된 큰 종이 걸려 있었다는데 현재 복제된 종이 다른 곳에 전시되어 있고, 원래의 종은 오키나와 현립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종에 새겨진 글이 관심을 끈다. 그곳의 설명문에는 영어로 ‘류큐왕국은 한국과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아름다운 나라로 여러 나라의 다리 역할을 했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적혀 있지만 원문을 번역한 자료를 보면 이런 내용이다
‘류큐 국은 남해에 있는 좋은 땅으로 삼한(三韓, 즉 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고, 대명(大明, 즉 중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면서 일역(日域, 즉 일본)과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류큐는 이 한가운데에 솟아난 낙원이다. 선박을 운행하여 만국의 진량(津梁 가교)이 되고 외국의 산물과 보배는 온 나라에 가득하다.’
이 종을 ‘萬國津梁(만국 진량)의 종’이라고 부른다. ‘만국 진량’은 무역으로 많은 나라의 가교가 되는 해양 국가라는 뜻으로 중국과 일본과는 떼어낼 수 없는 관계로 보고 있다.
그런데 그들보다 먼저 삼한, 즉 조선의 빼어남을 모아 놓았다고 이야기한다. 조선은 멀리 떨어진 나라인데 왜? 그만큼 조선의 문화를 흠모했으며 형제의 나라로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서 뛰어난 문화는 불교 대장경으로, 조선에 방문하여 가장 먼저 원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불교 대장경은 고려시대의 유물이었지만 그것을 이어받은 조선을 그들은 문화의 나라로 여겼다. 류큐왕국은 조선처럼 유교를 받아들였지만 동시에 불교를 믿었기에 불교 대장경을 모신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오키나와인들은 어디서 왔을까?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있는 설과 증거들이 많다. 나중에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겠지만 한반도 하고도 연관된 설들이 많다.
어쨌든 대체적으로 본다면, 중국, 일본, 남방에서 온 원주민들이 살다가 차차 구스쿠(성) 시대, 즉 성을 중심으로 모여 사는 시대가 도래하고, 14세기 초기부터 산잔(三山) 시대가 열린다. 아지(按司)라고 불리는 부족장들이 주변을 통합하면서 호쿠잔(北山), 츄우잔(中山), 난잔(南山) 등의 세 지역에서 소왕국들이 등장하는데, 호쿠잔은 오키나와 본섬의 북쪽 지역인 나고, 나키진 지역이고, 츄우잔 지역은 슈리, 나하 요미탄, 가츠렌 등이며 난잔 지역은 사시키, 치넨, 오오자토 지역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북산(北山), 중산(中山), 남산(南山) 등 작은 왕국이 나타나 삼국 시대처럼 ‘삼산(三山)’ 시대를 열었다. 이것을 통일한 세력이 현재 슈리성을 근거지로 둔 ‘중산’이었다. 왜 ‘산(山) 자가 붙었는지는 슈리성이나, 북쪽의 북산(北山)의 근거지인 나키진 성터에 가보니 알 수 있다. 성들이 다 산에 있다. 국토가 좁고 길며, 어딜 가나 해변이고 들판이 없다 보니 쓰나미나 해상에서 공격해 오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산에 성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1429년 최초로 오키나와 본섬을 통일한 중산왕은 자기들 의사와 상관없이 명나라에서 일방적으로 불렀던 ‘류큐국(琉球國)’이란 국명을 쓰기 시작한다. 이를 제1 쇼우 씨 왕조라 부르는데 약 40년간 존속하다가 1469년 왕조 내의 실력자였던 우치마 가나마루가 왕이 되면서 제2 쇼우 씨 왕조가 나타난다. 제2 쇼우 씨 왕조의 3대 쇼우신왕은 1477년–1526년(조선의 성종, 연산군, 중종 시대)까지 50년간 재위하면서 류큐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류큐 왕국은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하면서 부를 축적했고 멀리 타이완에 가까운 미야코, 야에야마 제도를 평정했다. 그리고 현재 태국인 샴 왕국과 말레이시아에 있는 멜라카 등과도 교역을 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때까지 중국인들을 바다로 나가지 못하게 했던 명나라의 해금 정책이 이완되면서, 중국 무역선이 직접 동남아시아 해역에 진출했고, 포르투갈, 에스파니아 상인들도 이 지역에 나타나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과 직접 교역하자 류큐왕국은 쇠락하기 시작한다.
1609년 류큐 왕국은 규슈, 가고시마 지방이 터전인 사쓰마 번에 의해 침략을 받는다. 이 침략의 계기가 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1년 전쟁을 위해 류큐 왕국에 군량미를 요구했지만 류큐는 그럴 사정이 아니었다. 결국 류큐는 요구한 양의 반은 공출하고 나머지 반은 사쓰마 번에서 빌렸다. 전쟁이 끝난 후, 류큐 왕국은 사쓰마 번에 상환을 계속 미루었고, 1603년 에도 막부가 성립된 뒤 사쓰마 번으로부터 막부 개설을 축하하는 사절 파견을 독촉받았지만 이 또한 무시했다.
류큐 왕은 설마 사쓰마 번이 자기들을 침략하랴 생각했지만, 사쓰마 번은 병사 3천 명을 태운 100 여척의 배로 류큐를 침공했다. 왕을 비롯한 주요 가신들이 사쓰마 번에 끌려갔다 돌아오는데, 이후부터 류큐 왕국은 중국과 일본 양쪽의 눈치를 보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조공 무역을 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영향을 받는다.
류큐 사절은 막부의 쇼군을 알현할 때는 중국 의복을 입고 중국 음악을 연주했다. 중국 문화권에서 사는 먼 나라의 사람들이 복속했다는 것을 보여주어 자신들의 위세를 드높이기 위한 막부의 연출이었다. 반면에 사쓰마 번의 영주 시마즈 씨 앞에서는 류큐 국 옷을 입고, 류큐 음악을 연주해야만 했다. 또한 중국 사신이 류큐 왕국에 오면 주민들의 일본어를 금지하고 일본풍의 옷을 입지 못하게 했다. 그곳에 주둔해 있던 사쓰마 군사, 관리들도 자취를 감추었다. 류큐 국과 일본 모두 류큐 국이 일본에 종속되었다는 것이 중국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다. 일본은 명나라와의 교역 창구로 류큐 국을 이용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철저히 류큐 국을 자기들의 과시욕의 수단, 혹은 무역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대했다. 두 강대국 사이에 낀 약소국 류큐 국의 서글픈 모습이었다.
계속 기울던 류큐 왕국은 종말을 향해 갔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1872년, 류큐 국왕을 일본 천황 밑에 있는 류큐번의 왕으로 임명했다. 독립국이 아니라 지방 정권으로 강등한 것이다. 그리고 1879년에는 ‘류큐 처분’을 통해 류큐 국을 일본에 강제 병합시키면서 ‘오키나와현’으로 만든다. 이로써 약 450년간 지속되던 류큐 왕국은 사라졌다.
힘이 없던 류큐 국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과정이 진행될 때 임 세공이란 류큐 국의 관리는 베이징에서 자결까지 하며 청나라의 개입을 호소했다. (이런 과정을 보면 구한말 시대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 등으로 나뉘며 갈가리 찢기던 우리의 모습이 상상된다. )
청나라는 일본에 대해 항의를 했고 일본은 중국 내에서 ‘최혜국’ 무역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오키나와를 둘로 분리하자는 제안을 한다. 즉 가장 멀리 있는 미야코와 야에야마 제도의 섬들을 중국에 주고, 오키나와 본섬과 이북의 섬들을 자기들이 갖는 분할 안이었다. 그러자 청나라는 미야코와 야에야마 제도 등의 섬들은 청나라 것으로, 오키나와 본섬 북부에 있는 섬들은 일본 영토로, 오키나와 본섬은 류큐 왕국으로 보존하는 ‘류쿠 삼분할 안’을 제안한다. 일본은 이를 거부하면서 교섭은 중단되었다. 그 후 1895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중국은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류큐 제도에 대한 일본의 주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했고 대만 역시 일본에 할양했다.
이로써 오키나와는 일본화되면서 류큐 왕국은 사라진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신분제 폐지 정책,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정책을 실시하고 교통 통신 시설, 우편, 라디오 방송 등의 근대 문명을 오키나와에 이식시켰다.
그런 가운데 오키나와의 식자층 사이에서도 오키나와의 언어와 전통문화를 제거하고 내면까지도 일본화하자는 운동이 일어난다. 오타 초후라는 인물은 재채기까지도 일본을 따라가야 하며 인사말, 장례식도 일본화하자고 주장한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1/100 밖에 안 되는 약소민족이기에 도저히 고유 풍습을 유지할 수 없으니 이왕 일본화될 것이라면 더 적극적으로 하여 빨리 일본인의 대접을 받자는 현실적인 목적을 내세웠다. 1892년에는 류큐신보가 발간되면서 오키나와 주민은 일본 본토 주민들과 관심사를 공유했고 베네딕트 앤더슨이 지적했듯이 ‘상상의 공동체’인 일본이라는 국가, 민족에 편입된다. 이로써 류큐왕국은 역사도, 정치, 경제도, 문화도, 언어도 모두 일본화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키나와인은 이렇게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화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일본은 오키나와를 차별했다. 2차 세계 대전 때는 일본과 천황을 위해 싸웠지만 일본군은 오키나와인을 스파이로 의심했고, 오키나와를 본토 방어를 위한 ‘버리는 돌’ 정도로 취급했으며 주민들에게 자살을 강요했다는 증언이 무수하게 나온다. 오키나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미군의 일본 본토 진격을 늦추기 위한 전쟁터로 여겼으며, 옥쇄 전략을 취했기 때문에 오키나와 주민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미군이 점령하자 오키나와인은 또 피해를 입는다. 오키나와인들은 미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고 해방된 류큐 왕국의 백성도 아니었다. 미군정은 기지 건설을 위해 강압적으로 토지를 수용하고 시민의 기본권을 탄압했다. 기댈 데 없는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 복귀 운동을 벌인다. 그렇게 되면 일본의 평화헌법 하에서 보호를 받게 되고, 오키나와 내의 미군기지가 철수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결국 1972년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된다. 그러나 미군 기지는 철수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피해를 입게 된다.(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더)
대한제국은 류큐왕국보다 31년 후인 1910년에 일본에 합병되었다. 그런데 일본이 패배하면서 우리는 해방되고 독립되었지만 류큐 왕국은 독립하지 못했다. 오키나와 사람들의 가슴에는 이런저런 한이 맺혀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는 아직 오키나와 사람들의 깊은 속을 잘 모른다. 뉴스나 자료를 통해 보면 많은 이들이 이런 갈등과 차별로 인해 분노와 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지인을 통해서 들어본 바에 의하면 그래도 일본 때문에 살기가 더 좋아졌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또한 침묵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분명한 것은 오키나와인은 일본어를 쓰며 일본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일본 본토인과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키나와 인을 보면 괜스레 정이 간다. 처참한 피해와 아픔과 차별 속에서 살아나 다시 삶을 일구어 내고 있는 그들이 애잔하다. 관광지의 상인들도 그렇지만 주택가를 걷다가 만난 사람들, 특히 전쟁의 아픔과 가난을 겪어내고 살아남은 노인들이 조심스레 걷는 모습이 아련하게 보인다.
그러나 그만큼 그들은 대단함에 틀림없다. 살아낸다는 것, 그것만큼 숭고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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