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글이 잘 나오나?
어떤 글이 좋은 글일까?
그 기준에 대해 확신을 갖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감히 그런 말을 못 한다. 가치관, 도덕, 윤리, 믿음 조차 계속 변해가는 시대에 확고 불변한 좋은 글에 대한 기준을 나는 잘 모른다.
흔히 간결체가 좋다고 한다. 나도 물론 좋아한다. 글 초보자들은 그렇게 시작하는 게 편하다. 일단 폼 잡지 않고 명확하게 쓰는 훈련이 필요하니까. 그러나 항상 그렇지는 않다. 이 세상에는 만연체의 멋진 문장도 있고, 상황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체는 변한다. 그 외에도 은유, 상징, 비유 등 수많은 기법이 있겠지만 그것에 대한 판단도 사람마다 다르다. 하여 나는 어떤 것이 좋은 글인가에 대한 문제는 계속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글이 잘 나오는 방법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다. 재능이 모자라고, 글에 대한 배움이 얕아서 글이 안 나와 고민한 경험이 많기 때문이다.
뻑적지근한 삶이 먼저다.
우선 머릿속에 안개가 부옇게 끼어 있다면 글을 안 쓰는 게 낫다. 고민하면 뭐하나? 고통만 느끼지. 안개가 끼면 방법이 없다. 그때는 쉬고 노는 게 좋다. 그런데도 쓰고 싶다? 왜? 글 쓰는 게 폼이 나 보여서? 그 폼은 왜?... 이런 것부터 먼저 생각해보는 게 좋다.
그렇다. 생각이다. 생각이 싹터야 글이 나온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글 쓸 생각을 하지 말고 생각을 많이 하는 게 좋다. 생각하기도 싫다? 그럼 생각 안 하면 된다. 내 말은 억지로 글 쓰지 말라는 것이다. 억지로 나오는 글을 뭐하러 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거나, 사랑을 하는 게 낫지. 그렇게 즐겁게 살다 보면, 또 상처 받다 보면 생각이 전개되고 감정이 솟구친다. 그럼 글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즉 뻑적지근하게 살자는 이야기다. 글쓰기를 치장으로 삼지 말고. 그런 허심탄회한 마음, 겸허한 마음, 솔직한 마음이 글쓰기의 첫 번 째다. 글쓰기 위한 글, 폼나 보이기 위한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한다.
어깨에 힘을 빼야 한다.
두 번째로 남에게 멋진 글을 써보여야 한다는 자의식을 버려야 한다. 상상마당에서 여행작가 강의를 하는 동안, 과제물을 내주면 아주 어색한 글들이 많이 보였다. 그런데 그런 분들 블로그에 가보면 얼마나 자연스럽고 경쾌하게 글을 잘 풀어내는지 정말 놀랐다. 글쓰기 실력이 문제가 아니라 무거운 자의식 때문이었다. 물론, 그런 블로그 글이 다 잘 쓴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자연스러운 '자기만의 글'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일단 그렇게 '자기 글'을 허심탄회하게, 솔직하게 쓰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있다. 그 상태에서 전진하는 것이다.
당연히 많이 읽어야 한다. 그러나...
세 번째로 당연히 많이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도 막막하다. 무엇을, 어떻게? 젠장 읽을 게 한두 가지인가? 또 우리 삶이 얼마나 바쁜가? 일하느라 바쁘고, 노느라 바쁘고, 먹느라 바쁘고, 휴대폰 보느라 바쁘고...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 있어도 읽기 싫다. 시간 나면 휴대폰을 보고 카톡을 하지.
이미 읽기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알아서 잘하겠지만 읽기 훈련조차 안 된 사람들은 솔직히 방법이 없다. 어디 가둬 놓지 않은 이상... 아, 감방이 있구나. 교도소 가면 다들 그렇게 책을 읽는다고 한다. 그렇다고 일부러 교도소에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시대 환경이 책 읽기에 아주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세상으로부터 소외받고, 상처 받고, 관계에 지친 사람들, 도망치고 싶은 사람들이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소외된 사람들에게 내리는 하늘의 축복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지는 않는다.
방법이 한 가지 있다. 역설적으로 책 많이 읽을 욕심을 버려야 한다. 마음을 편하게 먹고 한 달에 한 권이라도 천천히 읽는 게 좋다. 천천히 읽는다 함은 생각하면서 읽는다는 것. 다 읽고 나서 혹은 한 챕터를 읽고 나서 다시 두 번째 읽으며 생각하고 상상하면 훨씬 즐겁다. 잘 읽히지 않는다면 한 문장, 한 문장 천천히 읽으며 생각을 굴려야 한다.
다시 나온 말이 생각이다. 책을 과시욕으로, 단지 지식을 얻기 위해 부지런히 읽는 것은 적어도 글을 쓰기 위한 과정에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학원에서 시험문제 달달 외는 것과 같다. 생각을 자기 식대로 전개시키지 않으면 다 헛수고다.
경험이 많으면 당연히 좋다.
네 번째로 경험이 많으면 당연히 좋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나?
그러므로 엄청난 경험은 못해도, 일상에서의 작은 경험을 자꾸 생각하고 곱씹어 보면 좋다.
또 생각이 나왔다.
쓰기 훈련을 해야 한다.
다섯 번째로, 아무리 생각이 많아도 글쓰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글이 잘 안 나온다.
아무리 글쓰기 기교를 알고, 재능이 많아도 궁둥이를 붙이고 뭔가를 쓰는 습관이 없으면 다 소용없다. 휴대폰 끄고, 인터넷 끄고 잠시나마 글에 집중하는 시간, 그것부터 확보해야 한다. 최소한 그런 의지는 필요하다.
읽는 대상을 명확히 해야 한다.
여섯 번째,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쓰는 대상이 명확하면 잘 나온다. 연애편지를 써 보아라. 하루 종일 매달려 쓰고 또 쓴다. 그것처럼 잘 나오는 글은 없을 것이다. 아니면 누굴 음해하든지, 공격하든지, 자길 방어하든지... 즉, 분명한 대상, 들어줄 사람이 명확할 때 글이 잘 나온다. 글을 쓸 때 이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대상이 명확치 않다. 실용문, 연설문은 대상이 명확한데, 소설 같은 예술적인 글은 정말 모호하다. 물론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를 대상으로 하지만, 자기 안에서 솟구치는 그 생각, 상상, 열정은 목적이 불분명하고 어디로 갈지 모른다. 그런 글쓰기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과도 같아서 매우 힘든 것으로 안다.
잡지사 청탁 글은 원하는 게 분명히 있다. 독자층도 분명하다. 여행기 여행 에세이는 대상이 있지만 책을 쓰는 경우에는 막막하다. 자기 자신이 알아서 설정해야 한다. 어떤 독자층을 향해 써야 하나? 20대? 30대? 남성? 여성? 직장인? 중년? 등등.
그런데 자기 안에서 솟구치는 열정이 강하다 보면 그런 것을 신경 쓰기 싫어진다. 남 신경 안 쓰고 자기가 자기를 향해서 쓰고 싶어 진다. 사실 이 상태가 글이 가장 잘 나온다. 그러나 나중에 이야기하겠지만, 그런 경우 너무 자기 함몰적인 일기장처럼 되는 경우가 많다. 일기장은 남들에게 공감 못 받는 경우가 많다. ‘그건 니 얘기고...’ 하는 식으로. 어쨌든 일단 글쓰기는 그런 대상이 분명할 때 신바람이 난다.
에크리튀르도 중요하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언어가 쓰이는 규칙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랑그(문법적 체계 속의 언어)와 스타일이 있다.
랑그는 그 언어권에서 사용하는 규칙들로 어쩔 수없이 지켜야 한다. 즉 한국어를 선택했으면 한국어 문법 체계를 지켜야 한다. 또 스타일은 저자의 내부에서 형성된 것으로 자신이 선호하는 글투, 리듬 등이다. 랑그나 스타일은 저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표출된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런데 에크리튀르는 글 쓰는 이가 의도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에크리튀르는 그 언어가 대상으로 선택하는 ‘사회적 장’에 맞춰 쓰는 글쓰기를 말한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에크리튀르라는 개념을 알든, 모르든 작가들은 ‘에크리튀르’에 대해 고민한다. 이것은 작가가 의도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걸 매우 중요시한다.
조금 더 예를 든다면, 어떤 작가든 글쓰기 전에 ‘어떤 식’으로 시작할까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대중들을 생각해서 편안하게 얘기하듯이 쓸까? 지적이고 진지한 독자들을 생각해서 근엄하게 쓸까? 혹은 사회적 이슈를 부각하기 위해 욕설을 섞어가며 선동적으로 쓸까? 이렇게 고민하는 과정에서 글을 읽는 대상, 자신의 목적 등이 선명해진다.
당신은 어떤 에크리튀르를 선택할 것인가?
막연하게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이런 개념을 인식하면 글쓰기의 목표가 뚜렷해지면서 추진력이 생기게 된다.
정리를 하자면 먼저 뻑적지근하게 살자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며 기쁨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까칠함이든, 사랑이든... 그런 감정이 고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런 과정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이 고이면 글은 자연스럽게 솟구치게 되어 있다.
그게 안 되면 기다려야지. 그리고 더 뻑적지근하게 살아야지. 뻑적지근하게 산다는 것이 무슨 사건을 저지르고 요란하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살더라도 사물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치열하게 성찰하는 삶을 말한다. 또 직접 경험이 아니더라도 남의 책을 읽으며 간접 경험을 쌓고. 천천히, 꼭꼭 씹어 가며 음미하면서 살아간다는 의미다.
그런데 잡다한 책 많이 읽고, 잡다한 지식 많이 쌓이면 오히려 글쓰기에 방해가 된다. 허세만 늘면서 절실한 게 없어진다. 차라리 책을 읽지 않고, 나는 왜 책을 읽지 못하는가, 안 읽는가에 대해 고민하거나 스스로를 변호하는 ‘생각’을 하는 게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
즉 계속 강조하지만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자꾸 표현하는 훈련을 해야 하고, 누구를 향해 쓸 것인가를 명확히 하고, 어떤 분위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쓸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럼 무슨 글이든 일단 잘 나오게 되어 있다. 좋은 글에 대한 고민은 그런 글들이 많이 쌓인 후에 해도 전혀 늦지 않다.
(여행하고 돌아와도 왜 글이 잘 안 나올까?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나중에. 어쨌든 생활에서 먼저 글쓰기를 많이 하면 여행 가서도 글을 자꾸 쓰게 된다. 생활에서 글을 쓰지 않으면 여행 가서도 글이 나오기 힘들다.)
(이글에 대한 강의는 저의 '팟빵'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글과 달리 조금 다른 맛이 있을 것 같네요.
팟빵 검색하신 후, 저의 이름 '이지상'을 치면 나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