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이 함정이다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직장, 나오는 사람도 많은가 보다.
예전의 박카스 광고가 생각난다.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때려치워!'를 외치는 회사원들, 운동복 바람으로 누워 텔레비전을 보는 사내는 '직장이 있어야지 때려치우지...'라며 부러워하고, 그 늘어진 사내를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부동자세의 군인 졸병, 그 군인을 보고 '저때가 좋았지...'라는 회사원. 윤회처럼 돌고 도는 우리의 삶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오면서도 서글펐다. 내 삶을 돌아보니 더 그랬다.
30년 전, 자유롭게 살겠다며 직장을 '때려치우고' 세계를 훨훨 돌아다녔던 나. 좋았지. 히말라야 산맥을 걸으며, 시베리아 벌판을 기차를 타고 횡단하며, 타클라마칸 사막을 버스를 타고 종단하며 '죽어도 좋아!'라며 눈물을 흘렸었다. 그때는 바람이었고 자유였으니까.
그러나 삶은 만만치 않았다. 부모님의 병환, 생활고, 다시 뿌리내리기 위한 고투가 이어졌다. 글을 쓰고 강의를 하는 프리랜서의 삶은 '프리 댄서'의 삶이었다. 노동자도 아니고 예술가도 아닌 삶. 가끔은 혼자서 즐겁게 춤추다가도, 남들 앞에서 수모를 당하며 어색한 춤을 추는 프리 댄서. 그리고 점점 기력이 쇠해가는 중년의 고비를 넘어가고 있다.
퇴사를 꿈꾸는 이들이 나에게 종종 여행작가의 길에 대해서 묻는다. 대개는 여행하면서 글 쓰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 연봉도 물어본다. 연봉? 허허. 그걸 내가 어찌 아나? 어쩔 때는 마이너스고, 어쩔 때는 플러스지. 몇 년 잘 나가도 몇십 년 놓고 보면 그건 알 수가 없는 거다. 아니 어쩌면 인생 자체가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돈 갖고 이런 길 물으면 답변할 말이 없다.
그런 삶을 헤쳐가는 방법에도 특별한 것이 없다. 그냥 팔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노력은 물론 했지. 그러나 여차저차 하다 보니 된 거다. '장기하와 얼굴들'이 '그건 니 생각이고'에서 노래한 것처럼 원래부터 내 길이 있는 게 아니라, 가다 보면 어찌어찌 내 길이 되는 거였다. 어차피 자신은 타인의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 또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니 우린 서로 모르고 책임져주지 못한다. 물론 성실해야지. 그러나 삶에는 운도 많이 작용하더라. 어떤 법칙, 해답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자, 그러니 안락함을 바라고, 연봉 얼마를 바라고, 편안하고 안전한 삶을 원하는 사람들 결코 자유로운 삶을 꿈꾸지 마라. 퇴사는 해도 돼. 이런저런 준비를 해서, 요렇게 조렇게 준비를 해서 다른 직장을 얻거나,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일은 잘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 분야를 잘 모르니까 뭐라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해서 쾌적하고, 안락한 삶을 살면 좋지. 그런데, 박카스 선전에서 보듯이 삶은 돌고 돈다. 그 직장, 사업은 다시 인간관계, 비즈니스적 관계가 맺어지면서 또 '때려치워, 말아' 하며 고민이 올 것이다. 자유로운 삶은 아니다.
그럼, 나처럼 배낭 메고 여행이나 하면 자유로운 삶이 올까? 천만에. 아까 말했잖아요. 부모님의 병환, 간호, 내 경제적인 문제, 노화 과정,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곤함 - 프리 댄서의 삶 역시 온갖 서러움이 있다 - 이게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사방이 함정이다. 니체가 '차라투스투라'에서 말했던 것처럼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에 놓인 밧줄이며, 건너가는 것도 위태롭고, 지나가는 도중도 위태롭고, 뒤돌아보는 것도 위태롭고, 그 위에 떨며 머물러 있는 것도 위태롭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어디로 가야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
몰락이다. 몰락을 받아들이면 된다.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하나의 다리이지 목적이 아니다. 인간이 사랑받을 수 있는 점은 인간이 과도이며 몰락이라는 것이다. (몰락에 대해서는 앞으로 천천히 이야기 하자. 간단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래, 30년 전 내가 퇴사를 앞두고 사표를 만지작거리던 그 시절 나는 극심한 갈등에 빠졌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꿈꿔왔던 세계 여행이었고 고등학교 시절에 밀항을 꿈꾸며 몸부림쳤던 나였는데 막상 할 수 있는 환경, 즉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자 나는 오히려 망설였다. 직장을 나온다는 것이 두려웠다. 가을 어느 날 밤길을 걸어 집으로 올 때면 멀리 보이는 아파트촌 불빛을 보면 서러웠다. 내가 배낭을 메고 먼길을 떠나면 다시는 저 따스한 세상으로 못 돌아갈 것 같았다. 영원히 그렇게 길에서 헤매다 죽어버릴지 모른다는 공포감도 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토록 꿈꿔 왔던 것이 이루어지기 직전인데. 내가 쪼다처럼 보였다. 그저 상상 속에서나 멋진 꿈을 꾸고 막상 눈앞에 그 순간이 닥쳐오니 무서워하는 겁쟁이.
그때 몰락을 꿈꾸었다. 몰락하자. 추락하자.
10월 어느 일요일 아침에 도봉산에 올라갔다. 무슨 바위인지 이름은 잊었다. 종종 타던 포대 능선에 있던 거대한 바위였다. 중간에 틈이 나 있어서 기어올라가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나는 무서워서 오르지 못했었다.한 20미터 정도 되나? 밧줄도 없이 거기 오르다 떨어지면 곧바로 바위에 부딪쳐 즉사하거나, 그 밑의 낭떠러지로 떨어지면 비명도 못 지르고 죽을 곳이었다. 무서워서 못 올라가면 쪽 팔릴까 봐 아무도 없는 아침에 그곳에 다시 갔다. 여길 올라가면 사표 내고 떠나는 것이고 못 올라가면 깨끗이 잊자고 결심했다.
그 앞에 서니 계곡 밑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살벌했다. 바위의 냉기가 나를 밀어내는 것만 같았다. 밑을 내려다보니 까마득한 절벽. 물론, 내가 서 있는 곳은 평평한 바위 주변이지만 두세 걸음만 나가면 절벽이었다.
올라가기 시작했다. 바위틈에 몸을 끼고 비비대면서 손으로 잡고 올라갔다. 비교적 쉬웠다. 다만 공포심이 문제였지. 그런데 반 정도 올라왔을 때 툭 튀어나온 바위가 있었다. 큰 항아리만 한 바위였다. 불룩 나온 배를 내 배로 감싸고 올라가야 하는데 내 손과 발이 버틸 수 있을까? 덜덜 떨었다. 내려가도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쪽팔릴 것도 없었댜. 다만 내가 치욕스러웠지. 나는 일생일대의 결단을 앞에 두고 있던 것이다. 올라가기로 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몰락을 결심했다. 오른손을 뻗어 바위 위쪽을 잡았다. 오른발을 올려서 바위틈을 디뎠다. 이제 왼쪽 팔을 뻗어서 불룩 나온 바위 위쪽의 어딘가를 잡아야만 했다. 그런데 그 어딘가가 보이지 않았다. 젠장. 앞서 가는 이가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실패하면 버덩 거리다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딱 달라붙어서 한동안을 생각하다, 에라아 아... 신음 소리를 내면서 왼손을 뻗어 뭔가를 잡았다. 잡혔다. 그리고 왼발을 올리며 바위틈에 걸쳤다. 되었다. 중심이 잡혔다. 양손에 힘을 주며 양발을 밀어 놀렸다. 개구리가 발을 쭉 뻗으며 나가듯이.
그리고 나는 너무도 싱겁게 위로 쑥 올라갔고 내 배는 바위를 넘어 평평한 곳에 안착했고 내 다리는 계속 뻗어가며 내 몸을 밀어냈다.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금 더 기어 올라가 보니 평평하고 넓은 바위가 나왔다. 자리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파란 가을 하늘이 가없이 드넓었다.
그래, 떠나자. 앞으로 뭘 먹고살지? 모르겠다. 그 시절 여행작가, 여행가, 배낭 여행사 같은 것들은 잊지도 않았다.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살면 되지. 이렇게 안간힘을 쓰면서 몸부림 치면 산입에 거미줄 치겠는가?
다만 부모님께 죄송했다. 평생 가난 속에서 고생했고, 자식이 이제 직장에 들어가 돈 좀 벌어 집이 좀 안정되려고 하던 찰나, 무작정, 무책임하게 떠나려던 나.
부모님, 저를 용서하세요. 당신 자식의 욕망이 이리도 강합니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결국 나는 살아냈다. 앞으로도 이렇게 살아낼 것이다. 그래서 자랑스럽냐고?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자꾸 눈물이 솟구친다. 그 후 불쌍하게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나서다. 평생 고생과 걱정만 시켜드렸기 때문이다.
그 후 계속 들락날락거렸다. 거의 1년에 가까운 장기 여행도 몇 번, 혹은 몇 개월씩 떠나는 여행이 계속되었다. 돈 떨어지면 돌아와 알바를 하다가 돈 생기면 떠나는 생활. 갈 때마다 중풍 걸린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안 그랬다.
"어서 가. 날아가는 새처럼 훨훨 날아가"
물론,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지금도 두 분의 표정은 방금 전의 일처럼 생생하다. 두 분이 아파트 창문에서 나를 내려보고, 나는 손을 흔들고... 저 실크로드 오지, 사막으로 들어가면 연락도 안 되는 상황. 그때 휴대폰이 어디 있나? 거의 1년 동안 중국 실크로드를 거쳐, 파미르 고원을 넘어 유럽 대륙 끝까지 가는 길, 한 달에 한번 전화를 할까 말까. 아버지는 두 번째 중풍으로 반신불수. 언제 쓰러지시면 연락도 안 닿는 상황. 이것이 영원한 이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면서 걸었다.
그러니 내가 지금 행복할 수 있는가? 내가 자유롭게 살았다고 할 수 있는가? 그건 또 무슨 자유인가?
그런데 나는 왜 그토록 떠나려고 했을까?
쓰고 보니 너무 비장하다. 그러나 과장한 것은 아니다. 내 가슴에는 아직도 시퍼런 멍이 들어 있고 매일 매일 속죄의 기도를 한다. 정말이다. 매일매일. 아침저녁으로. 요즘 젊은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여행이 뭐 그리 비장하냐고. 그 시절 상황이 그랬다.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이었고, 부모님 엄청나게 고생, 희생했고, 자식만 바라보면서 사셨고, 장남의 책임감, 의무감이란 게 짙게 내 가슴에 배어 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앞날은 막막했다. 그 시절 나에게 되풀이 되는 장기여행은 마치 연을 끊고 떠나는 출가 같은 가출이었다. 나는 가족의 연까지 끊고 떠나는 독한 놈이었다.
내 일대기를 쓰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16년 전에 나는 '여행가'라는 책에 아주 쉽지만 진솔하게 나의 그런 이야기를 썼었다. (지금은 아마 도서관에나 있겠지만)
다만, 미리 나의 이력과 사정을 말해야, 앞으로 퇴사 후의 프리랜서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를 조금이나마 신뢰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나의 이력을 먼저 썼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금수저 입에 물고 태어난 한량처럼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그런 이야기는 듣기가 싫다.
앞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시시콜콜한 내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프리랜서의 삶을 이어가는 태도에 대해서 얘기할 것이다. 태도에는 마음의 자세는 물론, 실질적인 생활의 자세,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된다. 삶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나, 이렇게 자유롭게 살았다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아니다. 젊을 때 자유라는 말 참, 많이 했는데 이제 그런 말이 다가오지 않는다. 뭔가 겉도는 느낌. 삶이 이렇게 팍팍한데, 사방이 함정인데. 그러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그 무엇'은 있다. 평생 내가 붙잡고 살아가는 '그 무엇'. 그것은 차차 생각하며 표현해보기로 하자.
요즘 세상에는 실용적인 정보, 요령, 기획... 그런 이야기들이 풍부하다. 물론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도 도움이 안 될 수도 있다.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들어도 잘 모른다. 또 경험하면 다 터득하게 되어 있다. 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알게 된다. 내가 그렇게 헤쳐 나왔으니까. 궁즉통이라 부딪치면서 밀고 가면 된다.
그런데 태도는 정말 중요하다. 세상은 무시무시하다. 사방이 함정이다. 젊을 때 방자하게 살다가 한방에 훅 가는 사람들도 종종 보았다. 어떤 법칙을 이야기하고, 도덕적으로 살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그런 틀을 매우 싫어하고 알지도 못한다. 왔다 갔다 하면서 늘 흔들리면서 살아가고 있다.
다만, 칼을 들고 방어하고, 상대방을 벨 때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듯이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가다듬어야 할 자세는 분명히 있다. 앞으로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무작정 시작해본다. 하는 데까지. 기획도 없다. 그냥 브런치 들어와서 하얀 화면 보다가 뭔가 솟구치면 나오는 것을 받아 적을 뿐. 무슨 글이 나올지 나도 모르겠다. 그게 글 쓰는 재미다. 머릿속에서 기획하는 글, 기획하는 삶, 기획하는 여행은 재미없다. 나는 그게 싫어서 무작정 여행을 떠났던 사람이었다.
하도 요즘 퇴사니...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와서 글을 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