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화와 개똥철학
안개패랭이는 안개꽃과 패랭이가 합쳐져 만들어진 이름이다. 꽃은 안개꽃인데 그 모양새가 패랭이를 그대로 본 딴 듯하다. 패랭이는 옛날, 신분이 낮은 서민들이 즐겨 쓴 모자의 일종으로 꽃 모양이 패랭이 형태를 띠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패랭이'라는 이름 때문에 소박해 보이지만, 줄기 하나하나 만들어진 선을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어느새 생각이 달라진다. 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있고, 그 줄기마다 꽃이 피어있는 모양이 안개가 번져있는 것처럼 환상적이다.
가만히 눈으로 즐기면 제대로 보인다. 아주 가늘지만 길게 늘어진 줄기의 자태가 얼마나 힘이 있고 기개가 느껴지는지. 어느 젊은 선비의 붓 터치가 이러지 않았을까! 단, 꽃이 매우 작다 보니 정원에서 존재감이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눈여겨 찾지 않으면 잊히기 쉬운 존재다. 그래서 다른 꽃 무리 속에 파묻혀 습해서 썩지 않도록 해도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 심는 게 좋다.
이 이야기는 내가 중학생 때, 그러니까 사십 년 전 일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술이 거하게 취해서 집에 돌아오셨다. 아버지는 내게 양복 윗저고리를 받아 옷장에 걸어두라고 하셨다. 그때, 아버지 양복 안주머니가 불룩 튀어나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살짝 열어보니, 만 원짜리 지폐가 두툼하게, 뭉칫돈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다. 며칠 후에도 아버지 양복 주머니를 보았는데 그 돈이 그대로 있는 것이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일 친구들이랑 생일 밥 먹기로 했는데, 용돈을 다 써버려서... 어떤 하지..'
그래서 '아버지 돈을 몰래 조금 써도 금방 티가 안 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만 원짜리 한 장을 빼낸 것이었다. 다음 날, 그 돈으로 친구들이랑 읍내에 새로 생긴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함박스테이크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사 먹고 놀았다. 그런데, '실컷 잘 먹고 잘 놀고' 집으로 마지막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데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라는 생각이 들고 후회가 되는 것이었다. 또, 무섭게 화를 낼 아버지가 떠올랐고 가족들은 나에게 뭐라고 할지. 너무나 겁이 나서 울면서 집으로 왔다. 눈이 퉁퉁 부은 걸 보고 엄마가 자꾸 물었다.
"니 왜 우노? 뭔 일 있었나!"
"엄마... 내가 아부지 돈을..."
"문디, 가쓰나(여자애)가 간도 크다!"
"흐흐 흐흑....."
그러면서 엄마는 아버지 몰래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시면서 '얼른 아버지 양복 주머니에 그대로 갖다 두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엄마가 준 돈을 아버지 양복에 넣으려고 그 안을 들여다보는 데, 내가 너무 놀라서 '엄마!'하고 소리를 질러버린 것이었다. 그 호주머니 속에는 천 원짜리 지폐가 이전보다 더 많이 뭉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걸 보고 '아이고, 너그 아부지가 다 알았나 보네...'하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린 내가 쓰기 좋도록 아버지가 만 원짜리를 모두 천 원짜리로 바꾸어서 넣어두셨던 것이었다. 엄마 설명을 듣고 나는 너무나 놀라서 아버지가 일하는 곳으로 뛰어가서 용서를 빌었다.
"아부지... 제가... 정말 잘못했어 예... 다시는 안 그럴게 예... 죄송합니데..."
"개안타! 암(아무런) 말 안 해도 된다!"
닭똥 같은 눈물을 쏟으며 훌쩍거리는 나를 보시며 원래도 말수가 적은 아버지인데 그날 저녁 내내 자꾸 똑같은 말만 반복하셨다.
"개안타(괜찮다)... 개안타케도..."
그렇게 아버지는 큰소리로 혼내시거나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날, 아버지의 말 없는 용서와 사랑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말 없는 가르침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내내 내 삶의 뼈대가 되고 줄기가 되었다.
몇 년 전, 한 일간지에 실린 내용이다. 거실과 관련하여 <아버지>하면 연상되는 연관어를 조사해서 공개했다. 1위는 '나가다'17.1% 로 가장 높았고, 2위는 'TV'로 14.4%가 나왔다. 그다음은 거실에 '앉다', '계시다'였다. 이어서 '힘들다, 모른다, 무섭다, 싸운다' 등이 10위 권에 들었다고 한다. 이는 아버지란 존재는 '싫고 무섭고 부담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에 반해서, 엄마에 대한 연관어는 1위가 '놀다' , 2위가 '아침' 그리고 3위는 '이야기'였다. 이쯤 되면 예상이 될 텐데 이외 답변에는 '눕다, 대화하다, 웃다'와 같은 엄마와 관련한 연관어는 주로 긍정적인 단어였다. 이 조사는 LG CNS에서 6개월치 무려 1억 건의 소셜데이터를 검색한 결과였다.
옛 어르신들이 흔하게 쓰던 말 중에 '남편과 아버지는 방 안에서 기침만 해도 되는 존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요즘은 <공감>과 <소통>이 화두가 되다 보니 제대로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버지들이 가족들에게서 설 자리를 잃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아버지가 자기의 아버지로부터 가족에게 웃으면서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거나 배운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저 '가장'으로만 과묵한 게 미덕이라고 배웠고 직장에서는 입이 있어도 말을 못 하는 법을 몸으로 일평생 배웠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내 아버지가 말을 다정하게 못 하거나 안 한다고 해서 설 자리까지 위협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못하고 안 하면 가족들이 먼저 다가가서 제안하고 도우면 될 것이다. 그래도 안 하거나 못하면 '왜?' 그런지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 주고 다정히 먼저 물어보는 것부터 우선이 되면 좋겠다. 어쩌면, 아버지는 하는 말로써 인정할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버지, 그들이 지금까지 평생 가정을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한 그 역할로 충분히 인정하고 존경하고 존중해야 할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볼 때, 안개패랭이처럼 끝에 매달린 작은 꽃송이를 보지 말고 가늘게 길게 뻗은 힘 있는 줄기를 바라보자.
이 세상, 모든 꽃은 줄기가 바로 서야 비로소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가늘고 긴 줄기로 버티고 서있는 가장 귀한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