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했더니 나에게도 덤이 돌아왔습니다.
2019년 늦가을, (코로나바이러스 존재를 모를 때) 나는 다시 강사로서 일을 하기 위해 친분이 있는 에이전시 대표에게 연락했다. 성공학 특강이든 취업특강이든 '어떤 강의라도 좋으니 기회만 있으면 달려가겠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말도 기억난다. '땜빵(대타)이라도 자리가 나면 바로 갈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땜빵은 남의 일을 대신하여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어떤 강사가 개인 사정으로 진행이 어려울 때 대신 가는 것이다. 사실 '땜빵'은 특강 강사가 되기 위해서 어쩌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디서? 누가? 내가 뭐라고, 뭘 믿고, 두 시간을 오롯이 맡길 수 있단 말인가.'
이 말이면 상황은 다 이해가 될 것이다. 그래서 내 강의는 늘 명강사가 강의를 펑크 낸 곳에서 시작됐다. 대신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 이전 글에도 올렸지만 강사는 언제 Anytime, 어디서든 Anywhere 부르면 가서 해내야 하는 '애니콜 Anycall'이기 때문이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명강사 땜빵 전문 강사입니다."
이는 땜빵 특강을 갔을 때 내 첫인사 말이었다. 내가 웃기려고 한 말은 아닌데 이 말 때문인지 다들 '키득키득' 웃고 시작을 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분위기는 좋게(?)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억지로 웃기는 것보다 나으니 말이다. 그렇게 땜빵으로 시작한 특강은 제법 의미 있는 결과를 얻어내기도 했다. 다음부터는 아예 그 특강을 펑크 낸 '명강사가 아니라 나에게 맡으라'라고 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곳이 대학교 취업특강과 백화점 직원 교육 특강이다. 대학교 취업특강은 다행히 단골 대학교가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대구에 있는 한 대학교다. 한 번은 두 시간 특강을 마치고 나오니 담당자가 상사를 소개했다. 그 상사는 대뜸 내게 봉투 하나를 주는 것이었다.
"강사님, 학생들이 너무 좋아하고. 열정적으로 해 주셨는데... 적은 액수지만 기름값에 보태 주십시오."
이런 보너스(?) 봉투는 기업체 대표로부터 몇 번 받았다. “자기가 할 말을 대신해 주어서 고맙다'며 준 것이다. 그런데 대학교 직원이 보너스를 준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자주 간 백화점은 최장 10년 가까이했다. 각 지점마다 돌면서 정규직원 성공학 특강을 했다. 자주 가서 그런지 애정이 남다르기도 하다. 주로 소공동 호텔 지하에서 특강을 했는데 광주점까지도 매달 한 번씩 다녔으니 그럴 만도 한 것 같다. 최근, 집 근처 백화점에서 장을 보는데 직원 한 사람이 (수줍게) 인사를 했다.
"강사님, 강의 잘 들었어요."
"그때가 언제라고 아직도 기억을 하시네요."
"다 기억하고 있어요... 이거라도 제가 드리고 싶어요."
"아휴, 아닙니다..."
그렇게 소스 몇 개를 내 카트에 담는 것이었다. 소스도 고마웠지만 아직도 내 강의를 기억하고 재밌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정말 고마웠다. 며칠 뒤 장 보러 갈 때는 아예 책 한 권을 미리 준비해서 답례로 가져다주었더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며 흡족해하는 미소가 잊히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든다. 비유가 적절할지는 모르겠다. 엄마들끼리 하는 말이다.
"내가 내 자식을 볼 때 말이야. 조금만 더, 진짜 좀만 더하면 될 것 같은데."
"근데 그 자식이 그만큼을 더 안 한단 말이야"
"딱 요기까지만 하고 절대로 더 안 해.”
우리가 하는 <일>도 그런 것 아닐까. 학생이 지금보다 공부를 좀만 더 하면 더 나은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에 '여기까지'란 기준에서 조금만 더 해보면 의외의 성과나 성취를 끌어내기도 하니까 말이다. 땜빵으로 간 곳에서 (쓰러질 것 같아도) 좀만 더 열심히 했더니 박수를 더 받았고, 나중에는 땜빵이 아니라 정규 강의를 맡는 특강 강사가 되었다. 또, 전혀 기대하지 않은 보너스가 생기기도 한다. 더욱이 지금까지도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이래서 다시 강사로서 서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한 것 같다.
'그러니 공부든 무슨 일이든 지금 보다 더! 좀만 더! 해 보자. 반드시 내 인생에 그만큼 보너스가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어요?”
“내일 당장 할 수 있어요.”
지인 소개로 아르바이트 신청을 했더니 A이사라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대뜸 설명도 없이 신분증과 통장 사본을 보내라고 했다. 순간, 마음속으로는 세상이 (어떤 면에서는) 험해서인지 스미싱 의심도 잠시 들었다. 그렇지만 그쪽에서도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잠시 뒤 보내겠다고 했다.
오전에 통화를 해서 오후쯤 내일 일하러 오라는 전화가 올 것 같았다. 부랴부랴 냉장고를 털어 남편이 먹을 반찬을 준비했다. 그리고 점심을 제공하지 않는 곳도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밑반찬도 같이 만들었다.
이틀 사흘이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속은 건가?' 그런 생각이 들던 참에 전화가 왔다. 그것도 밤 12시에.
“낼 아침 8시까지 문자로 보내는 주소로 가세요. 첫날인데 늦지 말고요. 가면 다 알아서 가르쳐 줄 거예요.”
“네! 잘 찾아갈게요.”
드디어 내 첫 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주소를 받아 들고는 적잖이 당황했다. ‘산 00번지’. 산 번지는 정말 생소했다. 산속에 있는 회사인 듯싶었다. 모르는 주소라서 약간 불안했지만 약속은 했고 일을 준다고 하나 일단 가기로 했다. 12시에 다시 연락해서 '왜 주소가 산 번지냐'라고 물을 수는 없었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도착해보니 (다행히) 산속이 아니었다. 허허벌판, 농지 주변으로 지붕이 파란색인 공장과 물류센터들이 들어서 있었다. 내가 일할 곳은 큰 공장이었다. 기계 소리가 굉장히 컸다. 들어서자마자 직원 안내로 체온 체크하고, 회의 중이니 식당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식당에 남은 사람이 40대로 보이는 남성 한 명인 것으로 볼 때 나와 같은 처지로 보였다. 서로 눈인사만 간단히 했다.
“저기요. 이쪽으로 오세요.”
“네!”
“이거 사용해 봤어요?”
“네? 아... 지금 해 보면 잘할 것 같아요.”
홈쇼핑에서나 보았던 전동드릴이었다. 공장 전동드릴은 일반적인 것과 달리 힘이 세고 굉장히 무거웠다. 직원이 드릴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쎄에엥!” 화들짝 놀랐지만 놀라지 않은 척했다. 거기에 작은 나사를 끼워서 다 쓰고 남은 테이프 뼈다귀(?)에 나사 박는 연습을 몇 번 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할 일에 투입되었다.
그 공장은 LED 네온사인을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였다. 우리나라 대기업 상호를 알파벳 LED 등을 끼우는 것이었다. 나는 알파벳 등 하나에 일일이 4개에서 6개 사이 나사를 박는 드릴 작업을 하는 일이 주어졌다. 그렇게 나는 생전 처음 만져본 드릴을, (처음 간) 공장에서 (처음으로) 전동 드릴 일을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한 가지 생각만 했다.
“처음이지만, 처음처럼 하지 않아야 내일 또 나를 불러줄 것이다’
나는 (글에서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내 고향 동네에서 가장 실력 있는 목수 딸이다. 그래서 손으로 하는 것은 뭐든 자신 있었다. 아버지를 닮아서 흉내를 잘 내고 손이 빠른 편이라 금세 속도를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한테 '전동 드릴 작업 그까짓 거' 문제없을 줄 알았다. 오판이었다.
그 공장은 두 시간마다 ‘화장실 다녀오라’는 알람이 울렸다. 그때까지 정신없이 드릴 작업을 하다 보니 오른쪽 손목과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드릴도 무거웠지만 작은 나사를 일일이 끼우는 왼쪽 손가락도 금방 쓰라리고 욱신거렸다. 그 알람에 열 명 남짓 되는 공장 사람들이 휴게실(식당)을 가느라 내 옆을 지나갔다. 그때 60대 남자가 지나가다 나를 쳐다보았다.
“이거, 누가 가르쳐 준거야. 왜 자석을 안 끼워주고. 생고생을 시키는지 모르겠네.”
“아!”
그 남자가 노란색 동그란 자석을 가져다가 내 드릴에 끼워주며 시범을 보여 주었다. 신기하게도 나사 통에 드릴을 갖다 대기만 하면 나사가 '슝!'하고 날아와서 붙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는 광경이었다. 뾰족한 나사를 콕 집어서 드릴에 끼우던 왼쪽 손가락 세 개가 얼마나 아팠는지. 이런 게 말로만 듣던 '일부러 시키는 생고생이 이런 건가' 싶었다. 이후 여러 공장을 다니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가든 꼭 이렇게 (일부러) 생고생을 시키는 사람은 있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세상에는 똑부, 똑게, 멍부, 멍게가 있다고 한다. 똑부는 똑똑하면서 부지런한 사람이고, 똑게는 똑똑한데 게으른 사람이다. 멍부는 멍청하면서 부지런한 사람을 말하고, 멍게는 멍청하면서 게으른 사람이다. 이 비유는 주로 리더 이야기에 쓰이는데 나는 여기서 리더가 아니니 '멍청하고 부지런한 멍부 직원'에 해당하는 것 같다.
식당에서 눈인사를 나눈 40대 남자가 나한테 찾아와 말했다.
"이런 일 할 사람 아닌 것 같은데. 처음이죠?"
"왜요? 처음인데... 좀만 더 연습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남자 요지는 이런 것이다.
'일당바리(일용직)는 너무 열심히 안 해도 된다. 시간 지켜서 딱딱 쉬라고. 남들 일할 때만 눈치껏 일하라고.'
그 남자가 볼 때 '멍부'처럼 보이는 나에게 이런 일 많이 해 본 사람으로서 알려주는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초짜(?)인 나에게 참 고마운 말이었다. 그런데 나는 '내일도 이 공장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서'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일당바리(?)라도 열심히 하면 일을 더 주겠지'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공장은 '직원이 펑크 낼 때마다 나만 찾는다'라고 소개소 A이사가 말했다. 여기서 일당바리 중에서는 그나마 중요한 '땜빵'이 된 것이다.
알고 보니 첫 출근한 날도 땜빵이었다. 그렇게 땜빵으로 첫 출근한 공장에서 아침 9시부터 시작한 전동 드릴 작업을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고 오후 6시까지 서서 계속 일했다. 그날 오후 일당바리 대가 7만 원을 받았다. 몸은 비록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해냈다'는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다.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좋아하는 스콘 맛집에 들렀다.
"너무 맛있어요. 아들 여자 친구도 사 주게. 네 개는 따로 포장해 주세요!"
오호라! 스콘 맛집 주인이 덤으로 스콘 한 개를 더 주는 것이었다. 맛있다는 말 한마디 더 했을 뿐인데. 덤을 준 것이다. 가만히 보니 그렇다.
한글 <더>에 한자 입 구'口'를 아래에 붙이면 '덤'이 된다. 우리가 ‘하는 일에서도 좋은 말 한마디만 더해도 덤이 따라온다’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시작하든 '땜빵'이라고 해서 가벼이 보지 말자. 여기에 나의 열정, 나의 가치를 조금만 더하면 알게 된다. 나에게도 보너스 즉 덤이 따라오는 것을 말이다. 어떤 일이든 전문가가 되는 시작 지점이 바로 <남이 잠시 비운 자리, 땜빵>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