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부재
잘 알려져 있듯이, 소크라테스는 끊임없는 변증법적 담론을 통해 진리를 탐색하고자 했다. 끊임없이 나의 무지를 인정하는 게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이 전통은 오늘날에도 일부 사람들에게 유효한 사유의 기법이라 여겨진다. 대화를 통해 진리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다. 혹은, 무언가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믿지 않더라도, 어떤 진실에 도달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는 사람들이 꽤 있어보인다. 사실 의무교육이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국가와 사회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 통용되는 사실들을 주입시켜야 하고, 학교라는 기관이 비추는 빛에 의해 사실이 진실로 변모하게 된다. 제 본질은 감춰진채.
모든 주장은 일정한 오류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 오류는 인식의 한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예 1. 연애상담을 자주 듣다보면, 언어가 욕망과 감정의 기표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남자어'엔 욕망이, '여자어'엔 감정이 우세하게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 상담을 듣는 순간마다, 나는 '사실'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주체(상담자)로부터 재구성된 것인지 깨닫게 된다. 자신의 입장에서 진실이라 여겨진다는 것이, 언제나 편향성을 띈다는건 참 재밌는 일이다.
예 2. '동성애자는 비정상이다'와 같은 구시대적 통념은 정상성의 이름 아래 욕망을 억압하는 진술이다. 여기서 '정상성'이란 타자를 배제하고자 하는 주체의 욕망에 기반한 규범이다. '나'와 '타자'간의 비대칭적 권력을 형성하기 위해, '사실'은 권력의 도구로 작동한다.
인간의 '말'이 진리를 빗겨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기원한다. 감정적이기 때문에 인간이고, 다르게 표현해 이성적으로만 사고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다. 수학, 과학적 진술을 하지 않는 이상 '말'에는 감정이 담긴다. 이성적인 '말'조차도 욕망이라는 토대위에 세워진다.
그렇다면,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말은 존재할까? 만약 없다면, 우리가 ‘진실’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허상이 아닌가? 이에 대한 내 생각의 흐름에도 사실 '똑똑한척 함으로서 타인(독자)과의 권력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함'이 아닌가? 말과 그 이면의 욕망에 대한 관계를 생각했을 때, 진실이라 여겨지는 것들은 보편적이기보다 사회적 합의로서 인정되는, 간주관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을 읽고 토론을 하며, 뿐만 아니라 '깊은 대화'에 갈증을 느끼는가?
인문학의 효용을 얘기한다면, 진실을 밝히기 보다 가치를 창출하는 측면을 말해야 한다. 인간은 진실보다, 의미 있는 허구에 기대어 살아간다. 허구를 진실로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경향은 '나'의 생명력을 무한히 확장시키고 싶은 열망에서 비롯된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로맨스 소설을 읽기보다 사랑을 통한 초월을 경험하기 위해 읽듯이. 이런 면에서 '깊은 대화'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내기 위한 수단이다.
다시 토론에 대한 얘기로 돌아와, 우리의 언표행위에는 항상 욕망이 담기기에 진실을 빗겨간다. 토론을 통해 진실을 밝힌다는 것은 꽤 비합리적인 주장이다. 욕망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라, 상대의 생각을 읽어낼 수는 있어도 욕망을 이해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토론, 더 나아가 대화를 한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사유의 폭이 깊어질 희망을 가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추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성찰. 자신의 말에 담긴 무의식적 편향을 인정하는 것. 서로의 마음-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서로를 사랑하는 것에 의의를 둬야한다.
아무리 고상한 토론을 한다 한들. 철학적인 논의를 이끌어와 그럴싸한 주장을 이어나간다는 것은 덧없는 궤변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