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철학, 인간됨, 인과

by 이준서

친구들과의 술자리 대화 복기

1. 과학철학

친구들은 과학이 진리에 도달할 수 없는 일종의 ‘믿음’에 가깝다고 말했고, 나는 이에 대해 본능적인 저항감을 느꼈다. 나는 어느정도 물리를 깊게 공부했기 때문에 과학만능주의, 그리고 과학적 실재론에 대해 무조건적인 찬성을 표방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 법칙이 곧 물리아닌가. 경험주의적으로 과학이론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게 비합리적이다. 반면, 친구들은 과학의 오류가능성, 인문학적 가치에 대한 과학의 무용성을 주장했다.

나는 과학이 진리 혹은 종교에 가깝다 생각한다. 특히 물리학에는 반증가능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으며, 실재를 무엇보다 정확하게 묘사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과학이 ‘가치’를 말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친구들과 의견을 같이한다. 과학은 세계의 구조를 설명하지만, 그 안에 살아가는 존재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이런 면에서 인문학은 인류에게 가치, 그리고 미래/삶에 대한 방항성을 제시한다는 이점을 지니고 있다. 과학은 인간의 실존 및 본질에 대해 무수한 원자의 집합체로만 이루어진다는 설명만을 내놓는데,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윤리학에 대해 논하는가. 사회 공동체속의 개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수십광년 떨어진 별과 지구의 물리법칙은 동일하다. 우주상에 멀리 떨어진 원자와 식별불가능한 원자로 이루어진 인간이 어떤 연유로 인간이기에 갖는 가치, 혹은 인간됨이 갖는 특별함을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

과학이 절대적 진리로서 기능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주장이 오류가능성을 내포할 것이다. 오늘 나온 얘기는 아니지만 내 나름대로 살을 덧붙어보면 인간이 과학이라는 코드[프로그래밍]으로 구성된다고 해보자. 코드 자체는 오류가능성을 내포한다. 운영체제는 우리의 상식선에서 단순한 사회적 합의를 통한 산물이 아닌가. 프로그래밍 언어는 신이 아닌 개발자가 내려준 규범이다. 단순한 운영체제로 이루어진 개인이 운영체제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내놓는 것이 인문학의 의의일 것이며 이는 삶에 대한 고찰과도 이어진다. 주어진 규범을 성찰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됨에 대한 논의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즉, 인문학은 구조에 대한 성찰이다.

한편으로, 인문학은 가치를 부여한다.

미학을 공부하는 입장이다 보니, 예술철학에 대한 논의를 유비시켜보자. 예술작품은 단순히 색채와 형태의 조합으로 환원지을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작품들이 모두 색의 조합, 형태로 환원지어진다면 무엇이 예술적이고, 무엇이 추한 작품인지 결정내릴 수 있을까. 레오나르도의 작품과, 초등힉생이 공책에 그린 작품 모두 점, 선, 면으로 환원지어 생각된다면 예술 작품의 '가치'는 어떤 식으로 논증될까. 내가 생각하는 인문학의 필요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있다. 과학(이 맥락에서는 환원주의)은 (예술의 고유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한다.

조금 더 급진적인 관점에서는, 현대 사회에서 과학은 인간에게 허무주의라는 철학적 관점을 제시하며 인문학은 이에 대한 방어[비판]를 제공한다.


2. 인간됨/사랑

인간됨이라는 가치를 내려주는 학문으로서의 인문학.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됨인가?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에 대한 논의, 포스트 휴머니즘은 인문학의 가치, 혹은 과거에 만연했던 폭력에 대한 성찰로부터 기원한다. 인문학을 공부하다보면 기본적으로 아가페적인 사랑을 전제로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갖게 된다. 폭력이라는 짐승적인 행위를 인간됨의 영역에서 배제시키려는 시도가 그(아가페적인 사랑)의 일환일 것이다. 20세기 후반에서야 집중적으로 논의된 개념이긴 하나, 각 시대마다 인간됨, 그리고 사랑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인문학이 발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약자가 겪는 고충을 진솔하게 묘사하는 문학작품은 우리에게 연민의 감정을 환기하며, 구체적인 정치적 견해를 수립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인간됨이 어떤 절대적, 객관적 진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적어도 현대 사회에 속한 개인이 사랑에 대한 반성적 사유를 하게 함으로써 도덕적으로 발전된 사회를 형성하도록 이끌어낸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인문학은 정치적 색을 띄고 있으며, 거시적으로 공동체의 도덕적 인식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과학이 아무리 진리로서 기능한다 하여 그 누가 인문학이 갖는 정치적 요소에 반감을 느낄 수 있을까. 결국 삶은 타인과의 수많은 상호작용속에 이뤄지기 때문이다. 과학과 인문학은 양립가능하며, 양자 모두 세계를 설명하는 틀을 제공한다.


3. 인과

뉴턴법칙은 철학적 함축은 '힘'이라는 원인이 '운동'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냄이다. 혹은, 법칙은 인과 관계를 뒷받침한다. 뉴턴법칙[고전역학]은 시간, 공간이라는 절대적인 장 위에서의 운동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혹은, 시간, 공간이라는 실재를 상정한 뒤, 운동을 설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은 '운동' 개념을 통해 시간과 공간을 설명한다. 이 '운동'개념은 현대의 운동과는 매우 다른, 6가지 특성을 통해 정의되는 개념인데, 생성/소멸, 공간이동 등이 그 예이다. 이를 통해, 장소/공간, 시간의 여러 특성들을 이끌어낸다. 결국, 어떤 정의를 선험적으로 받아들인 후 자연법칙을 기술해야 한다는 한계는 고대 그리스나, 근대 과학이나 이겨내지 못한 것이다. 양자역학, 양자장론 등 현대 물리학또한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은 '파동함수'라는 실재를 상정함으로써(물론, 이에 대해 반실재론을 주장하는 과학철학자/물리학자들도 상당히 많다.) 양자역학의 해석까지 이끌어낸다. 과학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이론이 함축하는 인과관계에 대해 반성적 사유를 함은 인문학을 공부할 때에도 필요한 소양이다. 다음과 같은 예시를 떠올려보자.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떠났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김형도, 입속의 검은 잎 중.

나는 이 구절을 주체가 있기에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닌, 사랑이 있기에 주체를 논할 수 있음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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