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좋은 영화를 한 번만 보고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신이 없다. 마치 오늘 처음 본 사람을 구구절절 다 안 다는 듯이이야기 하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 같은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이 맞을 까. 오해의 소지를 불러오면 어떡하지. 에서 오는 죄책감.
지금 내가 영화<동주>에대해 쓰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써 내려가는 것은, “잊고 싶지 않아서” 이다. 지금 내 머리를 잠시 스쳐간 이 생각들을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다는 이 느낌은 <동주>를 보고 난 후라서 더 가깝게 다가온 것이 아닐까.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면, 그의 시는 모를지언정 그의 이름 “윤동주”는 한 번쯤 은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윤동주 시인을 욕하는 사람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도없다. 즉, 윤동주 시인은 우리에게 “위대한 시인, 위인”으로남아있다. 그는 “위인” 이라는이름에 가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윤동주 시인의 다른 면들은 숨은 채, 그저 훌륭한 시를 많이 남긴, 길이길이 기억되어야 할 인물로 그려졌다. “위인”이라는 명칭이 이렇게 독으로 작용할 수 도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대한민국 교육과정에 윤동주 시인의 시는 정말 많이 등장한다. 필자또한 중학교 1학년 과정에서 <서시>를 공부한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이 시를 기억하는 까닭은사실, 시에 깊은 감동을 느껴서는 아니었다. 배운 후에도종종 어디선가 우연히 <서시>를 읽게 되었고, 누구나 훌륭하고 아름다운 시라고 치켜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공부했던 다른 시보다 <서시>가 유독 유명해서였다. 이후에도 윤동주 시인의 다른 작품은 꽤많이 접했다. 시험지에서. <서시> 이후 읽게 된, 아니 풀게 된 시는 <길>이었다. 이때는 사실 조금의 감동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시험지 속에서 느낀 감정을 감동으로 인식했던 내가 조금 부끄럽다. 그리고 이때 한 번 더 느꼈던 건, 윤동주 시인은 항상 굳은 의지와 함께 자기 반성적인 태도의 시를 썼구나. 학생들을시 분석가로 만든 한국 교육의 폐해다.
“위인”이라는 가림판 때문에우리는 윤동주 시인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며,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동주>를 보고 나오니, 위인 윤동주가 아닌, 인간 윤동주를 보고 온 느낌이 들었다. 시험지 속에서는 느낄 수없던 그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벅차 올랐다. 내겐 국어 공부를 2시간한 것 보다 이 영화를 본 것이 더욱 값졌다. 아무리 분석해도 나에게 다가오지 않았던 그 시에 대한 <감상> 이 영상과 함께 동주 역을 맡은 강하늘이 조용히내레이션으로 다가왔을 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이미 시를 가슴으로 느끼고 있었다.
영화는 위인 윤동주의 업적을 다룬 전기적 영화가 아니었다. 그 시대에살았던 인간 윤동주를 그렸다. 영화로 본 동주는 조금 낯설다. 시험지에서본 동주와 같이 독립을 위한 굳은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한없이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질투도 느끼고, 부러움도 느끼며,망설인다.
영화는 흑백이다. 흑백은 가끔은 우울하고, 가끔은 절제하고, 가끔은 슬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서는 “동주” 라는 푸르지만부끄러운 젊음이 살아 숨쉰다. 발랄하고 생기가 도는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끊임없이 흔들리고 고뇌하는 것에서 힘들었던 그 시대의 청춘이 느껴진다. 흑백을 선택한 것은 정말 탁월한선택이었다. 흑백 속에서 가려진 푸르고 흔들리는 젊음이 더욱 빛난다.
<동주>는 러닝타임내내 “부끄러움”을 이야기 한다. 극 중 정지용 선생이 말한다.
“부끄러운 것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것이 아니며, 부끄러운 것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그렇다. 나는 한없이 부끄러운 사람이었다. 동주는 감히 이 시대에 태어나시인을 꿈꾼 것이 부끄럽다고 했다. 또 영화 매 순간 동주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지금 이 시대에 태어나 부끄럽다. 많은 장애물들에 가려진 진실을모르고 남들이 믿는 것을 믿고 남들이 옳다 하는 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내가 부끄럽다. 좋은 시를 보고도머리로만 이해하려 했던 내가 부끄럽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이 부끄러움을, 이 수 많은 부끄러움들을 오늘에야 알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은 부끄러울지 모른다. 모든 인생들은 후회로 넘쳐난다.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알고 되돌아보는 순간.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껴야 하는 과정이 아닐 까. 그런데도 나는 그걸모르고 살았다는 게 정말 부끄럽다. 동주가 부끄러워하고, 또부끄러워했듯이 나는 앞으로도 수 천 번, 수 만 번 부끄러워하는 것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과정이 앞으로는, 부끄럽지않을 것 같다.
앞으로 마음 속에 깊이, 표현 할 수 없는 감정의 응어리들도 머무를 윤동주의 시를 담는다.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對答)이다.
슬며ㅡ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가는 것일가.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그리고, 영화의 여운에 젖어 듣고 있는 동주의 ost <자화상>
이제야 윤동주 시인에 대해 한 걸음 알게 된 것 같다.
마음으로, 가슴으로 윤동주와 그의 시에 대해 공부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