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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in May 02. 2020

나의 어멍에게

그녀의 전설 2015, 김태용 감독 작품


    <그녀의 전설>은 우리에게 <만추>로 유명한 김태용 감독의 단편 영화로 물질을 하다 바다 속에서 사라진 해녀들은 곰이 되어 한라산에 살고 있다는 제주도 전설을 차용하여 만든 단편영화이다. 약사로 바쁜 워킹맘의 삶을 살고 있는 유진이 어느 날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제주도에서 여전히 물질을 하며 해녀로 살고 있는 어멍(엄마의 제주도 방언이다.)이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급히 어린 아들과 제주도에 내려가 실종신고를 하고 여기저기 찾아보지만 어멍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진은 미친듯이 우울해하거나 조급해하지 않는다. 어멍이 떠난 빈 집에 어린 아들과 함께 사람냄새를 채우면서 어멍을 기다릴 뿐이다. 그러다 창고에서 곰이 되어버린 어멍을 발견한다. 비현실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크게 놀라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곰이 된 어멍을 마냥 신기해하고, 금새 곰이 된 어멍과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낸다. 어멍은 곰이 되어버린 후 엄청나게 많은 음식을 먹고, 술에 취해 노래나 춤을 춘다. 평소 어멍에게는 볼 수 없었던 여유롭고, 게으르고, 편안한 모습을 보여준다. 특이한 것은 이 영화 내에서 어느 누구도 곰이 된 어멍을 보고 놀라거나, 이상한 현상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 누구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바닷가에서 유진과 곰이 된 어멍이 하는 대화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한다. 곰이 된 이후로 집에만 있더니 갑자기 제주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며 유진과 함께 바다로 온 뒤 유진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해녀였던 어멍의 어멍을 기다렸던 이야기, 가고 싶던 학교에 가지 못하고 바다로 던져져 해녀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 그렇게 포기 된 자신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술술 풀어 놓는다. 그러더니 유진에게 ‘고맙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한다. 자신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하고 싶은 공부해서 약사가 되게 해준 자신에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곰이 되기 이전에는 분명 할 수 없었던 이야기였을 것이다. 이 장면은 깊이 생각해볼수록 곰이 된 어멍의 귀여운 투정에서 깊은 슬픔이 묻어난다. 엄마도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질투한다. 어멍도 자신의 딸에게 한번쯤 질투를 느낀 것이 아닐까. 자신의 젊은 시절에는 누릴 수 없었던 것을 당차게 누려나가며 자신의 길을 걷는 유진을 보며 인간으로서의 질투를 느끼면서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꾹꾹 눌러온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아이가 더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오히려 자신의 현재를 희생했던 어멍. ‘고맙다’고 말해달라는 곰의 투정이 오히려 더 슬퍼보였다.


    이후에 어멍은 바다를 떠나 산에 가서 살겠다고 선언한다. 유진은 처음에는 이 말을 특별히 여기지 않는다.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으로 사라지고 마는 어멍을 바라보며 어딜 가냐며 소리친다. 그러나 어멍이 사라졌다고 했을 때도, 어멍이 곰이 되어 돌아왔을 때도 그랬듯이 유진은 자연스럽게 어멍의 결정을 받아들인다. 항상 유진은 어멍에 관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원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처음에는 조금 의뭉스러웠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엄마가 실종되고, 심지어 곰이 되어 돌아왔는데! 하지만 이 후에 이 영화에서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하고 나서 유진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그녀의 전설>은 어멍의 죽음을 절망적인 것이 아닌 아름다운 것으로 그려내고자 한다. 바다(현실)에서의 고됨에서 벗어나 산(쉼터)로 가 곰으로서 게으르게 살아가다 겨울잠에 빠지는 삶. 죽음이란 영원한 겨울잠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 같다. 유진은 그런 어멍을 잘 알기에 그녀의 쉼을 은연중에 지지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원래도 전설에서 곰이 그런 의미를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통해서 왜 어멍이 ‘곰’으로 변했는지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다른 동물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쉼의 상태인 죽음의 여행을 시작하는 어멍을 표현하기 위해 곰을 선택한 이유는 겨울잠과 산 때문인 것 같다. 산과 대조되는 바다는 다른 사람에게는 모르겠지만 평생 물질을 하며 해녀로 살아갔던 그녀에게는 현실을 살아나가기 위한 투쟁의 공간에 가깝다. 평생을 자신과 유진을 위해 싸워오던 곳을 벗어나 그와 대조된 곰의 서식지 산으로 간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곰 같이 완벽한 동물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죽음을 ‘쉼’ 이라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상태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겨울잠이라는 소재가 정말 적합한 것 같다.

    영화를 본 뒤, 나의 어멍을 바라보았다. 나의 어멍은 나를 위해 무엇을, 얼마나 포기하고 있는지. 나의 어멍도 점점 곰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나의 어멍이 유진의 어멍보다는 행복한 삶을 살면 좋겠다. 나보다 먼저 겨울잠을 자러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이 영화는 다시 한번 스스로의 어멍을 바라보라고, 자신의 어멍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홀로 곰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미리 되돌아보고, 그 변화를 알아채달라고 조그맣게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녀의 전설>은 이러한 얘기를 주장할 만큼 울적하고 슬픈 분위기가 아니다. 러닝타임 내내 채도 높은 제주도의 풍경과, 중간중간 뮤지컬적 요소가 들어가 오히려 유쾌하고 밝은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보고 듣고 즐길 것도 많은 단편영화이다.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과 극의 상반된 분위기가 오히려 감상자에게 깊은 감상을 요구하는 것 같다. 보고 나서 더 생각이 많아지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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