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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in May 01. 2020

'가볍고 투명한'_원앤제이 갤러리

정희민, 김세은, 성시경, 이희준, 박노완

2020.04.25 토

'가볍고 투명한'

삼청동 원앤제이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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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 You Get So Alone Sometimes - Hoax



4월부터 예정에 없던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안국역에 위치한 고등학생 입시학원의 영어 조교일인데, 출근길이 아주 좋다. 

왜냐면 내가 정말 정말 사랑하는 북촌 길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거 때문에 덜컥 하겠다고 한 것 도 있다. 

조금만 부지런하면 3시 출근하기 전에 매주 그곳을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2주는 내가 요즘 너무 게을러진 나머지 기상하자마자 바쁘게 와야 3시에 맞출 수 있었다. (그만큼 수면패턴이 망가졌다) 

사실 저번주에 갤러리 앞에까지 왔다가 시간이 애매해서 들어가지 못하고 학원에 조금 일찍 출발했다. 

하지만, 전시회가 딱 25일까지라 무조건 이날 가야했다. 안가기엔 너무 너무 기대하던 전시라서! 

그렇게 출근 한시간 전에 따뜻한 북촌 거리를 걸으며 갤러리에 다시 도착했다. 




원앤제이 갤러리는 현대카드 디자인 라이브러리 옆 쪽에 위치한다. 몇 번 지나쳤던 골목에 있었다. '가볍고 투명한' 전시는 막을 내렸지만 꾸준히 전시를 진행하는 것 같다. 무료관람으로, 1-2층이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안내 데스크에서 이름, 전화번호를 적고 들어가야한다. 에이포 용지로 제작된 간단한 브로슈어가 있다. 이 브로슈어가 전시를 관람하는데 있어서 필수적이다. 작품 아래 벽에 작가와 작품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의 브로슈어 뒷면에 작품의 위치 도면도와 각 위치에 해당하는 작가이름, 작품이름이 적혀져 있다. 일종의 지도인셈! 

처음에는 음, 좀 불편하다 싶었다. 

그런데 전시를 보다보니, 이것도 하나의 전략이구나! 싶었다. 


작품을 어떤 프레임도 갖지 않고 무해한 상태에서 바라볼 수 있다. 


작품을 보면서 '이 아이의 이름은 무엇일까, 나는 이런 느낌이 드는데 작가는 어떤 이름을 붙여줬을까,,'

조금 더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감상이 가능하다. 

더불어 이런 전략은 작품을 매개로 작가와, 관람자가 소통하게 만드는 것 같다. 

자신만의 작품이름을 상상해본 뒤, 작가가 정한 이름을 브로슈어를 통해 발견하면 

나의 감상과 작가의 의도 사이의 무언의 대화가 이뤄진다. 

또, 일종의 놀이와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도면을 들여다보며 이 작품의 위치는 어디인가, 이걸 다시 보려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딱딱하고 지루할 수 있는 전시 감상의 동선의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가볍고 투명한, 긍정으로 그림-삶-읽기

에이포 남짓한 브로슈어의 전시 해설은 내게 큰 감동을 주었다. 왠만한 컬러풀한 팜플렛보다 이 전시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 확실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알맹이가 실한 느낌. 사실 전문을 베껴보고 싶었는데, 고르고 골라 마음에 콕콕 박힌 부분만 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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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오랜된 과거들은 때로 지금의 미술에 부여된 무거운 짐이 된다. 미술의 기원을 구석기로부터 끌어올려 기술하는 미술사를 보면, 미술은 마치 그 유구한 역사 안에서 이전 시대에 미완된 과제를 완성하거나 또는 이미 완료돼버린 듯 보이는 유산들을 전복시키면서 스스로 부여한 과제들에 내내 시달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2020년에 도달한 미술은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며 이전의 것들을 뛰어넘거나 위반해 온 완벽한 기록을 우리에게 들이밀며 요청한다. 자, 너희들도 새로운 것을 보여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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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서 눈을 돌려 세상을 바라보면 어떤가. 밀레니엄이 훨씬 지난 2020년, 우리는 가상과 실재가 촘촘하게 뒤섞인 추상적이고 불가해한 시대를 살고 있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독해할 수 없는 세계의 면면들을 증명해내고, 인공지능과 가상현실들은 인간 존재와 삶을 위협한다. 우리는 이미 죽었거나 어떠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르는 것들에 관한- 그것이 미술이든 나 자신이든 - 진지한 고민과 사유를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지금 시대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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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 이면에 붙은 존재의 무거움은 언제까지고 우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지도. 역사는 어쩌면 기록되지 않는 편이 더 나았을지 모르겠다. 가볍고 투명한 현재의 삶을 위하여. 

요즘 내가 하던 고민들과 맞물리는 느낌이라 더욱 공감되었던 것 같다. 과연 겉과 내면은 얼만큼 달라질 수 있는지. 모든 기록되는 것들은 '편집'되어 있는 것인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지, 그걸 모르는 채 하는 우리는? 우리는 참 살면서 자신의, 타인의 많은 것들을 '모르는 채' 해주는 것 같다. '가볍게' 왜? 무겁게 만들고 싶지 않으니까. 속으로 딴 생각을 하더라도, 많은 것들을 모르는 채 해주고, 들춰내지 않는다. 거기서 생겨나는 수많은 모순들에 역겹기도 하고, 그렇게밖에 순응할 수 없는 내가 가끔 한심하긴 하지만, 어쩌겠나. 이게 살아가는 세상인 것 같다.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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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은, The hole has eyes ,2018 

김세은 작가는 근처 금호미술관에서 하고 있는 전시에도 많은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얼핏 보기에는 굉장히 무게감있는 유화로 깊이감을 표현한 것 같다. 수용성 유화물감을 사용했다고 한다. 

캔버스 위 수채화의 느낌을 준다. 재료 자체에서 무거움을 내포하고 있는 가벼움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림에 보여지는 흰 부분은 흰색 유화로 운동성을 더한 것 처럼 보이지만 빈 캔버스이다. 

작품의 이름을 보기 전에는 하나의 큰 소용돌이 같다고 생각했다.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했고, 사용한 재료에 대한 흥미가 다였는데 이름이 'The hole has eys' 란다. 흘긋 보고는 아, 인간의 눈을 표현한거구나 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구멍이 눈을 가진것이다. 구멍, 소용돌이에서 인간의 눈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읽고나니 이 구멍이 눈인지, 소용돌이인지 규정하는게 무엇이 중요한가 싶었다. 구멍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하늘성의 액체의 느낌은 눈물 같기도 하고,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그 무엇같기도 하다. 

우리는 보고 사는게 너무 많은 것 같다. 그 눈에 들어왔다고 해서 모두 소화되는 것도 아니다. 거기서 오는 혼란과 자괴감까지 느낄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 



성시경,  Slide ,2019

작품의 색조합이 눈에 띄는 작가였다. 무제인 작품이 많아서 이 작품도 무제일까? 라는 생각으로 두근거리면서 작품이름을 확인했는데.. 

Slide 라는 이름이 있었다! 이름을 알고나니 작가의 붓터치에서 자꾸 밀어내려는 느낌이 든다고 생각했다. 그리면서 뭔가 계속 밀어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요즘 취미로 추상화를 그려보곤 하는데, 붓터치 자체에서 오는 힐링이 있더라. 그리고 대체적으로 붓터치의 방향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고정되어 있다. 더불어 갈수록 바탕색과 브러쉬의 색깔이 밝아진다. 무겁고 어두운 것을 밀어내고 밝고, 가벼운 것으로 애써 나아가고자 하는 치유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또, 무제인 작품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 

이것도 깊이 고민해봤다. 어쩌면 우리 삶의 순간 순간은 이름붙이지 못하는 순간들이 훨씬 많지 않을까? 인생의 제목이 '무제'라면 참 슬프겠지만 말이다. 




정희민, What Window is Bearing?1,2 ,2019

사실, 정희민 작가의 작품이 너무 기대되었다. 디지털과 회화 그 중간에서 작가가 무얼 말하고 싶어하는지 실제로 보고 싶었다. 

모든 작품이 마찬가지이지만, 실제로보는 것과 핸드폰 속 화면으로 보는 것의 큰 차이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로슈어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다. 

" 마지막으로 정희민 작가는 디지털 이미지들의 가벼움과 그 이면에 있는 공허, 그리고 멜랑콜리한 감수성을 작품에 담는다." 

가장 요즘 내가 고민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보여지는 것과 숨기는 것 그것 중 어느 것이 이 시대에 더 가치 있을까? 

노트북, 컴퓨터, 태블릿, 핸드폰 속 window는 나의, 세계의 얼마만큼을 담아낼 수 있을까? 우선 그것을 규정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무엇을 드러내고, 드러내지 말아야할지 명확히 구분할 능력은 있는 걸까? 





정희민, Erase Everything But Love ,2018

그러나 사랑, 그럼에도 사랑, 그렇지만 사랑. 

무거움을 연출해내고 싶은 가벼운 시대에 사는 우리. 그럼에도 잊지 말아야할 건 사랑이 아닐까. 

라고 읽혀질 수도 있고. 

모든 것이 지워지고 사랑, 좋아요, like, 하트만의 가치가 살아남은 세상이라고 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깨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긁어낸 것 같기도하고 덧칠한 것 같기도 한 특이한 방법으로 연출되어져 있는데 가장 밑에 잇는 그림이 무얼까 궁금했다. 프레이밍되고 연출된 우리만 표현하는 디지털세계에서 우리의 가장 밑면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남아있는 본질은 무엇일까? 여러 이미지가 혼재되어 나타나는 '나'란 과연 세계에서 어떤 존재로 기억될까?

정희민, Before I fall ,2020

정희민 작가는 특히 이번 전시에 전시된 작품들에서 겔 미디움이라는 새로운 소재의 사용이 눈에 띄었다. 이 작품은 전면에 겔 미디움이 두껍게 텍스쳐로 느껴질만큼 발려져 있었다. 이 불투명하고 두꺼운 그 무언가의 재질을 바라보면서 이상하게 뭉클했다. 자신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늘 안쪽에서 바라보던 나의 페르소나, 겉 껍데기를 마치 밖에서 마주한 느낌이랄까. before i fall. 죽거나, 처절한 고통의 앞에서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을 하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내가 만들어온 껍데기의 나를 다른 사람처럼 바라보는 일. 그동안 몰라왔던 많이 고생했고, 시들어진 겉 껍데기를 마주하는 순간은 어떨까. 나는 많이 벅찰 것 같다. 


“때로는 내가 이미지의 잔상 속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런 이미지를 통해 만들어진 무의식적인 영향력 속에 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수많은 이미지가 지워지고 덧대어지고, 또 지워지면서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 같았죠. 이렇게 이미지를 경험하는 일은 회화라는 전통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었던 것 같아요.”
[네이버 지식백과] 정희민 - 평면에서 감각하는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 (헬로! 아티스트, 네이버문화재단)

박노완, 비닐봉지와 마네킹 다리, 2019

아름다운 색의 처절한 표현. 

색조합만 보면 싱그러운 봄이 생각나지만 그려져 있는 형태는 많이 처절하다. 비닐봉지와 마네킹 다리는 플라스티과 같이 인공적인 존재이고 그렇기에 많이 가볍다. 물리적으로도, 의미적으로도. 버려져지거나 하찮은 물건들에서 관찰되는 언캐니한 풍경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여 화면에 채우는 작가라고 브로슈어에 소개되어 있다. 버려지는 것들은 모두 가벼운 것일까, 버려지는 것들에 의해 인간은 무거운 문제에 직면하기도 한다. 아마도 우리 세계의 모든 문제들은 가벼운 것들을 하찮게 여겨서 그랬던 것이었다. 작품 전체에 흘러내리는 느낌이 인간의 가벼운 것을 가볍게 치부한 절망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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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무리

항상 네임드한 미술관의 기획전시를 돌아다니다가,  갤러리를 둘러보니 확실히 느낌이 색달랐다. 

우선 사람이 많이 없어서 혼자 여유롭게, 오래 생각을 정리하며 감상할 수 있어서 좋았다. 

메모앱을 켜놓고 바로 바로 사진을 찍어 밑에 감상을 메모했다. 

또, 한국의 아티스트들을 만나볼 수 있어 좋았다. 

앞으로 정희민, 박노완, 성시경, 김세은, 이희준 작가의 전시 소식이 들리면 찾아갈 것 같다. 

이렇게 내가 아는 아티스트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 싶다.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

찾아보니 삼청동, 소격동, 가회동 일대에 현재 운영하고 있는 갤러리들이 꽤 많았다. 

리스트를 만들어서 학원 출근하기 전에 부지런히 보고, 느끼고, 감상하고 싶다. 

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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