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튀르 랭보, 영화 <벌새> 그리고 연극 <프라이드>
‘ 인생은 불행이다. 쉴 틈 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곳에 존재하는 것일까? 저기에 있다. 미지의 공간에 진정한 시가.’
프랑스 상징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인 아르튀르 랭보가 이렇게 말했다. 인간에게 영원한 행복은 없다. 하루에도 수십번 씩 좋은 감정과 안 좋은 감정을 함께 끌어안고 버티며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나의 불행과 남의 행복을 비교하고, 우울에 빠지는 것을 괴로워하며 영원히 행복하지 못해서 안달인 것일까?
그 답은 파스칼 브뤼크네르의 ‘행복이라는 이름의 형벌’에서 찾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의 등장으로 우리는 우리 근원의 불안의 책임을 어디에 지울 수 없게 되었다. ‘불행한 건 내 탓, 행복한 건 내 덕’으로 생각해야 하는 사회인 것이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도 그들의 탓이 아니라, 감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나의 탓이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내 탓인 불행은 꽁꽁 감추고, 내 덕인 행복은 크게 크게 자랑해야한다. 아무도 자신의 불행을 말하지 않으니 이를 모르는 자들은 ‘나만 이렇게 많은 순간 불행하고 적은 순간 행복한 것 같아. 모두가 많은 순간 행복해 보이네.’라는 생각의 칼을 자기 자신에게 들이민다. 단지 행복하지 않다는 이유로 불행의 늪에 빠지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 파스칼 브뤼크네르는 인간은 결코 행복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슬픔이나 공허함 같은 감정과 정신 상태를 완전히 통제하겠다는 지나친 야심은 인간의 유한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현상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본성이라 생각하는 사회에 태어나 자라왔다. 이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랭보의 말처럼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라 인정하는 것이다. 인생이란 조금의 행복했던 순간과 일상의 불행을 견뎌내면서 살아가는 것이며 불행이 있기에 삶도 존재하는 것이라고 힘들겠지만 인정해보자. 그 다음은 불행은 나에게만 있는 우울이 아니라 삶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자. 그리고 우리는 랭보의 말처럼 미지의 공간에 진정한 시를 찾아야한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 <신체를 경멸하는 자들에 대하여>에서 창조란 자기극복의 과정이며 이는 현재 상태를 너무 만족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이 과정이 일어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즉 만족하지 말고, 안주하지 말고 계속해서 노력하고 창조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영원한 행복이 존재하기도 힘들지만, 그렇게 완전한 행복 속에서 진정한 시에서 창조가 일어나기도 힘들다. 그러기에 불행이 있는 과정 속에서 각자의 진정한 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진정한 시를 찾는 과정은 너무나도 험난할 것 같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불행을 모두 초연하게 감내해내기에는 인간은 너무나도 나약하다. 영화 ‘벌새’에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고 이상하지.’
대학교에 오고나서 다양한 사람들과 세계를 만나고 나니 사람들은 원래 참 이상한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인간은 갑작스럽고 미성숙하며 가끔은 모두가 조금씩 미친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 생각의 결론은 인간은 각자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나약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런 인간들이 모여 사는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참 신기하고 아름답고 이상한 공간일 것이다.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한 말이 가슴에 콕 박혀 잊혀지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불안이 있다.’
버려진다는 것, 연결이 끊긴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몸과 마음을 공유했던 타인 혹은 나 스스로와의 연결이 끊긴 상태, 흔히들 외로운 상태라고 한다. 대상이 어떠하든 인간은 외로운 상황에서 우울에 빠지고 한없이 나약해진다. 불행은 인정하는 삶에서도 연결은 필요하다.
가장 먼저 필요한 연결은 ‘나’와의 연결이다.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서 나의 내면과 연결되는 것이 필요하다. 내 마음들을 헤아리고 내 안의 불안과 슬픔을 드러내며 기꺼이 울줄아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내 삶의 탐구자가 되어야한다. 나의 불행을 내가 버리지 않아야한다. 어떤 순간에도 나와의 연결은 끊기지 않아야한다. 그것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버려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 즉, 연결이라는 단어를 사랑으로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모두들 알고 있는 말도 있지 않나. ‘나를 사랑할 수 있어야 남도 사랑할 수 있다.’ 나와 연결되어야 세상과, 타인과도 연결될 수 있다.
사랑과 행복이 같은 말일까? 사랑하는 과정 속에서 언제나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앞서 영원한 행복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사랑을 하며 고뇌하고 이해하는 밤을 지새우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필리아, 우애에 대하여’ 에서는 타인과, 세상과의 연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가난할 때나 다른여러 불행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친구가 유일한 피난처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기적이되고, 피난처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불행의 과정에서 연결된 타인과 함께 나아가고 진정한 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완전한 우애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만큼 상대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고 서로 사랑받기보다 사랑하기에 집중하는 같이 걸어가는 존재이다. 연애감정의 사랑이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우애이든( 연애 감정의 사랑도 우애를 포함할 때 바람직하다고 본다.) 진정한 시를 찾는 과정에서 어떤 불행이 얼마만큼 닥치더라도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며 그 연결을 지속해나가고자 하는 힘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는 그 사람과 ‘영원한 행복’을 지속해나가고 싶은 욕구와는 다르다. 사람은 모두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연결된 사람 때문에 불행하고 힘든 순간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연결의 이름으로 이해하고 고민하며 또 그 속에서 나 자신을 타인의 거울로 이해해보는 과정이 진정한 시로 나아가는 또 다른 가치 있는 삶의 과정일 것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인간에게 가장 가치 있고 아름다운 과정이라 불리는 것일 테다.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연극 ‘프라이드’의 티켓에 쓰여져 있던 카피 문구이다. 연극 ‘프라이드’는 성소수자 커플인 필립과 올리버의 이야기를 1958년과 2008년을 넘나들며 사랑과 정체성, 그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고자 하는 의지와 용기있는 목소리에 대해 다룬 작품이다. 행복과 불안 사이를 잘 견딜 수 있는 사랑과는 조금 같으면서도 다른 개념인 ‘연결’에 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 것도 ‘프라이드’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연극을 보고 남긴 글에는 ‘연결’이라는 말 대신 ‘가 닿음’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나 혼자 정의 내렸던 ‘가 닿음’이 영화 ‘벌새’ 관람, 김보라 감독의 강연을 통해 ‘연결’로 변화했다. 차별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우리가 행복이라는 형벌에 의해 지배받았던 것처럼 사회는 어쩌면 진정한 ‘나’라는 존재에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어버렸을지 모른다. 내 목소리가 나에게 닿아 연결될 때 진정한 내가 될 수 있고, 그 순간이 나를 사랑하는 삶의 시작이다. 벌새의 영지가 ‘ 아 이런 마음들이 있구나. 지금은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없구나.’ 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나를 사랑하는 삶도 언제나 완벽할 순 없다. 그러나 인정하는 것은 연결을 끊는 것이 아니다. 무관심이 아니면 된다. 이렇게 나와 연결되면 내 목소리를 비로소 타인에게 낼 수 있다. 그것이 닿아 끈처럼 나와 타인을 연결하는 순간, 서로의 목소리를 믿고 함께 나아가는 사랑이 시작된다. 매일 밤, 내 사람들에게 나의 목소리가 닿길 바라며, 나와 함께 역사를 만들어가주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완전한 우애에 완전히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해석한 바로는 이것이 바로 우애인 것 같다.
충분히 행복하지 못한 상태, 그렇다고 완전히 불행하지는 않은 것 같은 애매한 상태가 우리 삶에는 대부분 많이 존재한다. 나쁘지 않다. 그 정도 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행복을 강요받지 않아도 된다. 자신을 해칠 우울의 늪으로만 빠지지 않으면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결이 필요하다. 또,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건네줄 손도 필요하다. 불행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슬픔과 우울로 힘겨워하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줄 줄 알아야한다. 행복이 강요가 아니듯이, 더 이상 불행은 금기가 아니다. 함께 들어주고 보듬어가며 불행이라는 인생 속에서 진정한 시를 함께 찾아가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