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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in Jan 06. 2021

러덜리스, 키가 없는 배처럼 방향을 잃은.

영화 '러덜리스' 그리고 그 잔상. 

러덜리스, 키가 없는 배처럼 방향을 잃은


음악을 취미로 하는 대학생의 모습이 나온다. 잘 나가는 광고회사의 카피라이터인 아빠가 등장하고, 그가 대학교 총기 난사 사건을 뉴스로 접하는 모습이 보인다. 아들을 잃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빠, 자신의 일을 모두 포기하고 요트에서 살아가며 페인트 공을 직업으로 삼는다. 이혼한 부인이 아들의 음악작업의 흔적을 가져다준다. 죽은 아들의 음악에 심취하는 아빠, 아들의 노래를 무대 위로 올리고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준다. 여기까지 보면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아들이 남긴 음악으로 상처를 치유해나가는 힐링 음악 영화처럼 보인다. 실제로 영화 중반부까지 아들이 총기 난사 사건의 피해자인 것처럼 연출되고 있으나, 아버지 샘과 어머니 에밀리가 죽은 아들 조쉬의 묘비에 ‘살인자’ ,’극악무도한’ 과 같은 스프레이 낙서를 닦는 장면을 기점으로 아들 조쉬가 총기 난사 사건의 범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샘은 살인자인 아들의 노래를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즐긴다. 단순히 관람객에게 ‘치유’를 건네는 음악 영화가 아니라, ‘음악’을 매개로 하는 진지한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꽤나 무게 감 있는 영화였다.   


영화를 처음 보고 난 직후에는 어떤 사건의 피해자와 남은 피해자 주변의 아픔을 다루는 이야기는 많았지만, 가해자 주변 사람들의 감정과 고민을 다룬 이야기는 희소해서 주제 선택 자체에서 기발하다고 느꼈다. 영화를 다 보아도 왜 아들 조쉬가 그런 짓을 한 것인지 명확한 동기는 알 수 없게 설정한 것에 의문을 느꼈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가해자, 살인자’ 라는 프레임을 벗기고 ‘한 사람, 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할지,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자에게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닌지 고민해보게 되면서, 이런 고민을 던져주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떠나서, 소중한 한 사람을 잃은 남겨진 사람들의 감정 그 자체에 집중해보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신형철 평론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다시 펼쳐보았다. <러덜리스>의 이야기를 곱씹어보고 생각해보면서, 결국은 ‘누군가의 슬픔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타인의 슬픔을 마음대로 제단하고 비교해도 되는가’ 라는 고민까지 뻗어갔기 때문이다. 

감독은 '세상에는 마음대로 슬퍼할 수 없는 순간도 있다. 당신도 그 순간에 공감하고 그 순간을 고민해 볼 기회를 가져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맥락에서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 떠올랐다.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샘처럼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내가 모르는 사이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고 자살을 했다고 상상해봤다. 엄청난 충격이 가고, 처음에는 배신감이 몰려올 것 같다. ‘그럼 그 동안 나에게 보여줬던 모습은 위선이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이 남긴 감정의 흔적들을 찾아가며 나 자신이 싫어질 것 같다. ‘왜 내가 감싸주지 못했을까, 손을 내밀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먼저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타인의 슬픔을 미리 알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은 가해자와 피해자를 다 떠나서 그들이 떠난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 모두가 느낄 수 밖에 없는 인간 본연의 감정일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하이라이트라고 하는 엔딩의 무대 부분, 샘이 모두에게 자신의 아들이 살인자임을 고백하고 아들의 노래 ‘Sing along’ 을 부르는 장면에서 위의 책에서 발췌한 문장을 연결해 볼 수 있었다. ‘Sing along’은 아들 조쉬가 자신이 느낀 것을 고스란히 가사에 담은 노래이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그리고 남겨질 사람들에게 하는 말 같이 느껴지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뇌리에 박힌 가사가 있다. 

Maybe love is the only answer 어쩌면 사랑이 유일한 해답일지 몰라.


책의 인용문 중 밑줄 친 부분과 연결 지어 보니 사랑은 타인의 슬픔을 단단하고 힘들더라도, 깊게 이해해보고 ‘아, 이런 종류의 슬픔도 있구나. 이게 당신의 슬픔이구나.’ 라고 생각해보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살인자’의 남겨진 사람들을 다룬 감독의 의도를 더 정확히 이해해볼 수 있었다. 아무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니까.’ 라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해자의 남겨질 사람들은 마음 놓고 슬퍼할 자격도 없는 것일까? 이러한 고민에서는 임 현의 <그들의 이해관계> 라는 단편 소설이 떠올랐다.

맥락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죽은 자 뒤 남겨진 자의 감정을 소름 돋게 해석하여 녹여냈다는 점에서 아끼는 작품이어서 ‘러덜리스’와 꼭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들의 이해관계>의 줄거리는 이렇다. 이상한 노래 소리를 환청으로 듣고 자꾸만 정해진 노선을 탈출하려는 현상을 겪고 있는 버스기사가 운전에 집중하려고 다른 것에서는 신경을 안 쓰다가 주인공의 여자 친구를 휴게소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주인공의 여자 친구를 다시 태우기 위해 휴게소로 돌아가지만, 그녀는 이미 다른 차를 타고 떠나버린 상태이고, 안개로 인해 연쇄추돌 사고가 발생한다. 버스기사가 그녀를 태우러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면, 그 버스도 피해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주인공은 계속해서 되뇌인다. ‘어째서, 왜 하필 우리 혜주가.’ 혜주를 담보로 그 버스에 있는 사람들이 살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세상도 모를 우연의 행운으로 사고를 피할 수 있었던 버스기사는 ‘살아있어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조차 ‘미안해’한다. 나는 여기서 <러덜리스>와 비슷한 한 느낌을 받았다. 러덜리스의 샘은 아들 조쉬의 죽음을 함부로 슬퍼하지 못한다. ‘살인자’ 아들이기 때문에, 그로 인해 6명이 목숨을 잃었으므로 피해자들에게 계속해서 ‘미안해’ 하며 슬퍼하는 것조차 하지 못한다. 샘은 아들의 노래를 들으면서부터 ‘살인자’라는 프레임을 걷고 아들 조쉬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아들의 학교를 찾아가 아들의 이름이 제외된 6명만의 추모비가 있는 것을 보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운다. 2년이 지나고, 노래를 통해 아들을 한 명의 아파했던 인간으로 바라보며 그제서 슬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아들 조쉬의 여자 친구는 사건 이후 사회적 비난의 시선을 못 이긴 채 학교를 자퇴하고, 이름도 바꿔 살게 된다. 그녀에게도 ‘살인자의 여자친구’라는 프레임이 씌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하게 조쉬의 노래로 공연하는 샘을 보고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나는 이만큼 힘든데, 당신은 그 노래를 부르니 즐거워?’ 라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들의 이해관계>는 결국 슬픔의 관계에서 인간은 이해득실에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슬픔을 느끼는데 우리 멋대로 타인의 감정을 제단하고, 이익과 손실을 따질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버스기사가 행운에 의해 살아났지만, 그의 이익은 여자친구 혜주의 죽음에 대한 슬픔에서 죄책감으로 돌아올 뿐이다.


그래서 주인공이 버스기사를 만날 때 처음에는

 ‘난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어때.’ 라는 마음가짐을 가진다. 사람과 슬픔 사이에는 이해타산이 낄 자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다시 <러덜리스>로 돌아와 본다. 샘은 왜 아들의 노래를 자신의 목소리로 불렀을까? 내가 영화를 보며 가지처럼 떠올린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그들의 이해관계>를 이번 글을 쓰며 좀 더 깊이 엮어나가면서 내린 결론은 그것이 유일하게 죽은 조쉬의 남겨진 사람으로서 조쉬가 죽은 뒤에도 그를 사랑해줄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해타산에서 벗어나 오로지 아들만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엔딩 곡 ‘Sing along’의 가사를 조금 더 읽어보면, 샘이 아빠로서 아들의 노래를 세상에 꺼내 놓는 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조심스레 발을 내딛어봐 숨을 들이쉬고 별들을 세어봐 세상이 너 없이 돌아가게 내버려두렴. 만약 네가 어디선가 이 노래를 들을 수만 있다면 함께 노래를 불러줘. 눈을 감고 열까지 세어봐 어쩌면 사랑이 유일한 답일지도 몰라 네 노래를 부를 방법을 찾아볼 테니 함께 불려주렴.


조쉬의 살인 동기는 알 수 없지만, 함께 노래 불러줄 누군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아빠 샘이 아들의 이런 노래를 들었다면, 어떻게든 그가 남긴 노래를 함께 불러주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들의 죽음과 살인이 이해 가지 않고, 그의 죽음의 원인이 자신한테 있지는 않을까 자책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홀로 춥고 외로운 겨울에 갇혀있던 샘이 아들의 노래를 통해 늦었지만, 노래를 부를 때 잠시나마 여름을 맞이한 것 같이 뜨겁고,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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