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 신문 _ 전성태
단 한번이라도, 북한에 사는 사람들을 ‘북한 사람’ 이라는 단어에 얽매이지 않고 한 ‘인간’으로 바라본 적이 있었나? 이러한 물음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선뜻 그렇다고 답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서울에 사는 모두가 도시적인 삶을 영위하고 살지 않는 것처럼, 북한에 사는 모두가 우리가 ‘북한’하면 떠올리는 상징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다른 사상과 이념의 갈등이 낳은 ‘북한 사람’ 이라는 상징은 우리가 그들을 한 ‘인간’으로 마주했을 때 그들을 평가하고, 진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 되고 말았다.
그 이들도 거기가 지옥이었든 천당이었든 어쨌든 고향 아닌가벼.
작중 아파트에는 고향이 단순히 다른 지역이 아니라, 다른 세계인 사람들이 산다. 더 이상 사는 동안은 돌아갈 수 없는 곳이니 다른 ‘세계’라 명명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그 세계가 지옥이었든, 천당이었든 그 곳은 그들 ‘존재’가 시작한 곳이다. 오래 살았던 동네를 떠나와 다시 돌아갔을 때 이유 없이 분위기가 아련해지는 것처럼 그곳에서의 옳고 그름, 괴로웠던 것 혹은 즐거웠던 것 등 이항대립되는 것들의 평가유무는 그들이 그곳을 떠나온 순간, 미화되고 불분명해진다. 그곳은 그들에게 ‘고향’으로 남을 뿐이다.
북한과 남한이라는 규정짓는 단어에서 벗어나 이 아파트의 새터민들을 바라보면 그들이 한 없이 안타까워진다. 그들을 둘러싼 그 단어를 벗기고 한 ‘인간’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순간, 간첩이어서 감시 카메라일까 의심하고 있는 것 같은 청년은, 너무나 다른 세계에 와 적응하지 못하고 위태로워하는 나약한 젊은이로 읽히고, 두 딸을 중국에 두고 홀로 아픔을 견디고 있는 중년의 여성에게선 그저 쓸쓸함이 느껴질 뿐이다.
텍스트를 읽어내려가는 내내, 왠지 모를 긴장감이 느껴졌다. 과연 누가 간첩일까, 나씨가 저 신문을 갖고 있다가 간첩으로 몰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내 머릿속에선 홀로 스릴러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 신문이 그저 액자를 쌌던 포장에 불과했단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내 머릿속 스릴러와 그 문장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3번을 읽어야 했다. 사진틀이 의미하는 건 나씨가 그러했던 것처럼 두고 온 사랑들과 추억과, 고향을 의미하지 않을까. 사상과 이념이 가득한 신문의 내용에 쌓여 그 안에 쌓인 사진틀을 발견하지 못했단 사실은 독자인 나로 하여금 일상 속 분단이 얼마나 껍질만 남아 오해를 쌓고 있는지 성찰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