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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in Dec 23. 2020

소리 없는 폭력 경보음에 이젠 응답할 때

채식주의자_한강

소리 없는 폭력 경보음에 이젠 응답할 때소리 없는 폭력 경보음에 이젠 응답할 때

하루가 멀다 하고 핸드폰엔 재난 경보음이 울린다. 일상이 되어버린 사이렌 소리가 짜증이 날 때 즈음, 얼마나 이 재난 상황이 그저 그런 일상이 되었는지 되돌아본다.


사이렌 소리가 이렇게나 쉽게, 금방 성가셔졌다면 이미 내가 모르는 사이 내 일상에 얼마나 많은 사이렌이 묵음처리가 되었을지 생각해본다.


그러다 일상에 당연해진 폭력의 순간에도 폭력 경보음이 울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보았다. 우리에겐 폭력이 너무 일상적이다.


<채식주의자>의 영혜에게는 일생에 꼭 울렸어야 할 폭력 경보음이 꿈이 시작된 그 순간 몰아친 것이 분명하다. 연작 작품인 <나무 불꽃>을 살펴보면 ‘온순하지만 고지식해서 아버지의 비위를 잘 맞춰주지 못하던’ 영혜는 아버지의 상습적인 성추행을 견뎌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이후의 영혜의 일상 속 자리한 남자 또한 그녀를 영혜라는 실체 하는 자아로 보지 않는다. 자신의 뜻대로 이용하기를 원하는 남편일 뿐이다. <채식주의자>는 영혜에 관한 이야기지만 영혜의 목소리가 없다. 오직 “전, 고기를 안 먹어요”만이 영혜의 목소리로 재현된다. 시점은 영혜의 남편으로 주도되는데, 이 구조 자체가 영혜가 감당했던 무음의 폭력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영혜와 남편 그 둘의 사이에 영혜의 목소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편이 영혜를 ‘무색무취의, 개성이 없고 평범해서 마음에 들었던 여자’ 라 표현하는 것에서 영혜의 개인적 주체성은 말살된다. 영혜의 남편이 영혜라는 한 자아가 겪게 된 트라우마와 채식주의자 결정의 배경에 대해 이해해보려 노력하고 정상적인 대화를 시도했다면, 이 거대한 폭력의 줄기를 끊어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는 사회의 관점에서 비교적 ‘정상적인’남편이다. 영혜의 삶을 뒤덮던 무음의 폭력은 채식주의자 선언 이후에도 계속된다. 선언 이후의 폭력은 조금 흥미로운데, 완전한 무음이 아니다. 모두가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라는 걸 알지만 무음인 척, 무음이길 바라는 것과 같이 보인다.


작품(채식주의자 연작 3 작품) 속 남성들은(영혜의 아버지, 영혜의 남편, 영혜의 형부) 여성이라는 또 다른 인간을 ‘사랑’했다기보다 여성이라는 ‘껍데기’를 욕망한 것 같다. 즉, 무음의 폭력, 그 시발점은 껍데기만을 욕망하는, 내면을 알지 않으려 하는 심리라고 할 수 있다. 영혜에게 강제로 잠자리 행위를 시도하고, 이대로 파출부처럼 옆에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표현은 독자로 하여금 분노를 넘어선 무력감을 준다. 껍데기를 욕망했다는 말은 깊은 내면 혹은 그 내면의 입구도 알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 도드라진다. 반면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이야기인 <나무 불꽃>에서의 화자인 영혜의 언니 인혜는 남편으로 인한 무음의 폭력을 인지한 후 영혜의 내면을 읽는 시도를 한다. 이렇게 정상성을 벗어난 인물을 알기 위해 찾아 나선 정상적인 인물들은 자신 역시 스스로 감추었거나 잊었던 트라우마와 조우한다. 자신이 반창고 여러 개를 덧대 잠시 봉합해두었던 깊은 상처를 다시 한번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다수에 의해 오랜 시간 규정된 규범, 시선이 사람들이 무음의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는 것에 얼마나 무감각하게 만들었는지를 고민해 보게 된다. 들리지 않는 무음의 폭력에 더 민감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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