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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in May 09. 2020

가장 소중한 걸 잃고 가장 바라는 걸 얻었어

'시절과 기분' 김봉곤

창비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김봉곤 작가의 <시절과 기분>이 정식으로 출간되기 전에 가제본으로 먼저 만나 볼 수 있었다. 

엔드 게임, End Game.


삶이라는 무수한 게임 속 깔끔한 END는 존재할까?

엔드 게임, 끝난 게임. 



삶을 게임에 비유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무수한 선택과 판단, 그로 인한 행동이 삶을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언젠가 삶, 사람, 사랑이 비슷한 발음을 가진게 신기했던 적이 있다. 발음 뿐만 아니라 그들의 특성도 비슷하다. 


알 수 없고, 이상하고, 아름답다는 것. 


삶과 사람과 사랑이 게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아마도 끝과 시작이 게임만큼 명확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사람과 사랑의 발음을 적절히 섞어 줄여 우겨넣은 단어가 삶 인 것 처럼, 사람과 사랑을 우겨넣어 우리는하루 하루 살아간다. 이것들이 아직은 그 똑똑한 인류가 깔끔하게 정의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꾸준한 연구대상일 것이기에, 아름답고 요상하다. 


특히 이 '사랑'이란 것과, '사람'이란게 미치도록 섞여져 버린다면? 


더 복잡하고 알 수 없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어두운 밤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까닭은 아마도, 그 복잡한 것들로부터 '엔드게임'을 못 외쳤기 때문일 것이다. 


애초에 사랑으로 점철된 사람과의 관계를 '엔드게임' 선언하는 게, 가능할까? 


세상 참 넓다지만, 세상은 참 좁기도 해서 특히 각자 자기들의 세상은 더 좁다고 생각하기에 사랑하는 사람과의 게임은 쉽게 끝낼 수가 없다. 그것이 애정이든, 미련이든, 증오이든. 

원하고 원치 않고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삶이라는 이상하고 아름다운 것을 살아가는 존재라 그렇다. 




-


'엔드게임'은 '나'가 쓰는 전 연인 '형섭'과의 이야기이다. '나'의 일기를 훔쳐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드는데, 그 점이 참 매력적이다. '나'는 소설가로 '형섭'과 헤어진 후로 소설가로 성공했다. '나'와 '형섭'은 분명 헤어진 사이지만 친구처럼 안부를 묻고, 만나기도 한다. 특별하고 매력있는 전개는 아니다. 

그런데 사실, 이 이야기 나의 연애담이라 생각하면 거의 하나의 영화처럼 느껴질 것이다. 

모두의 하루가, 일상이 그렇다. 

내가 생각하면 감정이 하루에 백번은 왔다갔다하며 일생 일대의 사건이고, 미쳐돌아버리겠는 일들이지만. 돌이켜보면 


누구나 겪는 일이고, 누구나 읽었을 때 내 일기 같네, 할 것 같은 일들의 기록이다. 



이 남자들의 연애담도 똑같다. 




그런데, 이 소설가인 '나'의  서술이 아주 기가 막힌다. 

초등학교 때 일기를 쓰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가장 처음에 일기 전체를 포괄할 수 있는 문장을 하나 쓰라고 배우고,겪었던 일을 자신의 생각과 감상을 잘 곁들여서 적은 다음, 마무리로 하루 동안 얻은 교훈과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를 다짐하라고 배운다. 


소설의 가장 첫 문장인 


가장 소중한 걸 잃고 가장 바라는 걸 얻었어. 


그리고 이어 등장하는 


'나는 그를 잃은 척하지만,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를 잃지 않은 척하지만, 완전히 잃었다고도 생각한다.' 




이 초반부는 한마디로 '미련'을 이야기한다. 

엔드게임인줄 알았는데, 소중한 형섭을 잃고 바라는 소설가를 얻은 바람에. 잃은 형섭을 소재로 자신의 문학을 탄생시켰기 때문에 완전히 잃지는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또 영원히 자신의 문학에 봉인하므로 실제로 더이상의 연인관계는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미련. 


엔드게임이라 착각했고, 그랬기 때문에 완전히 엔드게임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일기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후반부. 

역시나 후반부에 매력이 철철 흘러넘쳤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살아야하는 시간이 압도적이라는 것. 그 당연한 사실 앞에서 나는 후자의 편을 들고 싶었다. 그게 훨씬 근사한 태도로 느껴졌으니까. 




끝내 알 수 없을 거라는, 끝을 낼 수 없을 거라는, 끝이 있을 거라는 말이,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할지라도 나는 굴복할수가 없다. 그 사실에, 사실 이전의 말에 미리 지고 싶지 않다. 






'아직은 삶의 시간에 질 수 없다. 내 부끄러움에 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나'는 초반부의 자신의 착각을 깬다. 삶에 엔드게임이란 없다. 인간은 '엔드게임'을 선언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형섭'을 소재로 글을 쓰면서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을 문학이라는 자기가 만든 좋은 프레임에 가둬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록 그와의 기억은 더 선명하고 뚜렷하게 재구성되었을 것이다. 글의 힘이 그렇게 무섭다. 그를 소재로 글을 써서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자기가 만들어낸 프레임  딱 하나만 벗어나면, 인간은 다시 다음 게임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존재다. 



이렇게 나의 감상을 쏟아내고 나니, 박준 시인의 추천사가 더 와닿는다. 

'김봉곤의 소설은 왜 이렇게나 아름다울까. (중략) 소설 속 인물들이 아름다울 때 까지 사랑을 하는 덕분일까. 

더불어 작가가 아름다울 때까지 사랑을 쓰는 덕분일까. 

사랑이란 나만큼 복잡다단한 존재가, 그래서 더욱 귀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배우는 과정임을 김봉곤의 소설을 읽으며 다시 생각한다.'



끝난 게임일 거라는 관계에 다시 도전하며 더 아름다울 때까지 사랑을 시도해나가는 주인공과 (그 아름다움은 객관적일 수 없지만) 아름다움을 향한 복잡다단한 과정을 보여주는 솔직하고 치열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다. 만들어진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기보다 독자가 각자의 아름다움을 상상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그것을 위해 나아갈 수 있도록 그 과정을 이야기해준다. 


원래 게임은 잘 안되고, 복잡하고, 대부분 괴롭고 가끔 짜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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