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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in Dec 26. 2020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거야

김숨의 책을 읽으며 증언문학, 공백에 주목할 것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망각과 기억의 경계, 증언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는 김복동의 증언과 이야기로 하여금 우리에게 우리는 얼마나 스스로의 삶에 질문을 던지며 살고 있는지 성찰하게 한다. 증언 문학이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기록만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증언이 아닌 객관적이고 완성된 역사라 칭해지며 그들을 일반화해왔던 기록이 현시대의 우리에게까지 무의식적으로 미치고 있는 영향을 지금이라도 막아보라는 신호처럼 들리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위안부들의 목소리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역사라는 프레임에서 차곡 차곡 쌓인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말이다. 김복동은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라던데...(71p)라고 말하며 책에서 내내 본인을 향한 질문을 던진다. 대부분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물음과 사랑에 대한 물음이다. 이러한 물음은 아직도 남아있는, 여전히 우리에게 해결해야 할 화두인 가부장적이고 여성이 대상화되는 사회 속 우리 스스로가 자문해야 할 질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증언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과거의 복원만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향해 서 있기도 하다. 그동안 위안부의 증언이 타자의 시선에서,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가부장제의 시선에서, 순결 이데올로기 안에서 멋대로 요리되어 온 현실을 마주해보면, 해당 작품과 같이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면으로 새운 작품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파편적인 그들의 목소리와 이를 최소한으로 연결하려는 소설적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김복동이 마주한 망각과 기억의 경계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숲이 아닌 나무를 보는 일.

증언은 어떤 면에서 문학과 매우 비슷하다. 증언은 존재하는 일을 시간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먼 훗날, 개인의 사고체계와 경험에 녹아 언어로 복원되는 일종의 재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언에는 팩트와 달리 서사가 주어진다. 논픽션의 ‘객관적’이고 ‘정리’된 서술은 무엇이 ‘객관적이고 정리된 것’ 인지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바라보면 또 하나의 정제된 프레임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사적 의미를 간직한 증언이 인간의 윤리성과 보편성, 그리고 최종적으로 인간의 존엄에 대해 여과 없이 쏟아내는 문학이라는 장르를 만났을 때, 모순적으로 조금 더 솔직해질 수 있다. 숲이 아닌 나무를 보라는 작가의 말과 같이 개별적인 것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기록자의 시선이 아니라 당사자의 시선에서 쏟아내는 역사적 사실들은 거시적인 프레임으로 환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마주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책을 읽어내려가면서도 가장 주목하게 된 부분은 김복동이 위안부 당시 처했던 상황 속에서 마주했던 감정과, 지금에서야 마주하는 자신의 감정,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다. 즉, 증언을 기반으로 한, 개인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픽션이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의 재현 뿐만 아니라 개인이 마주한 역사 위로 켜켜이 쌓인 감정과 삶의 태도의 역사를 들춰볼 수 있다. 함부로 환산되고, 프레임으로 잘라낼 수 없는 감정의 재현 가능성이 문학이 역사를 담아내고 있는 이유다. 그렇기에, 파편화된 증언 속 군데 군데 비어있는 기억의 공백도 문학이 제공하는 감정의 내러티브 안에서 무시되지 않고, 더욱 집중해야 하고 읽는 이가 스스로 고민하며 자신의 삶으로 끌어와야 하는 중요한 부분으로 여겨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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