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의 시간 3> 2021년 8월 13일
왠지 이날, 어머니 집에서 같이 잠을 자야 할 것 같다. 둘째딸아이도 “엄마, 오늘은 할머니 방에서 같이 자자.”하며 따라 나섰다. 어머니는 새벽 내내 기침 가래를 계속 뱉어내시며 정신이 혼미한 상태였다. 나는 새벽잠에 취해 눈을 감고 자동반사로 어머니의 등을 두드리고 배를 문질렀다.
아침 7시, 배로 불룩하게 차올랐던 복수가 결국 입으로 쏟아져나왔다. 흑갈색의 물질에서는 전복내장 같은 냄새가 진동했고 피와 복수가 섞인 것이다. 어머니는 호흡이 가빠졌고 체온이 38.5도가 나왔다. 기존 다니던 병원은 응급실 코로나 격리실이 만석이라고 한다. 어머니와 나를 태운 119는 일단 출발을 했고 구급대원은 가까운 병원에 코로나 격리실이 있는지 전화를 돌렸다. 마지막에 연결된 곳은 천생연분이신지 아버님이 다니는 분당 00병원이었다.
코로나 격리실로 들어가 산소호흡기를 달고 피를 뽑고 칼륨 수치를 빼야 한다며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심장 박동과 맥박수를 보며 응급 담당 의사는 오늘내일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한달을 살기 힘들다는 말이 이렇게 빨리 올 수 있단 말인가.
연명치료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가족들의 의견을 물었다. 심폐소생술을 하게 되면 어머니의 약한 갈비뼈가 부러질 수 있고 인공호흡기관을 목에 시술하다가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무서운 얘기를 하면서. 어머니는 건강하실 때부터 연명치료 거부에 사인하겠다고 말했던 터라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드리고 싶다고 결정을 했다.
“오빠 리안이 빨리 오라고 해,”
가시는 어머니도 슬프지만 남아있게 될 둘째 아이가 걱정되었다. 마지막까지 할머니가 불안하다며 밤샘 간호를 자처했던 단짝인 손녀이다. 대학생인 큰 조카의 인솔로 손자 손녀 4명이 먼저 도착했다. 둘째 아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어머니는 갑자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기 시작했다. 둘째 아이는 차마 할머니의 손을 잡지 못했다.
“할머니 끝까지 버티세요.”
라는 말을 하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었다.
우애가 깊은 어머니의 형제들도 재빨리 도착했다. 코로나 격리로 인해 한 사람씩 번갈아 들어가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형제들과 가족들은 “이제 편안히 가세요.”라는 뜻의 말을 했다. 나도 역시 “어머니 고생 많으셨어요. 고통 없이 이제 편히 하나님 곁으로 가세요.” 라고 말했다.
93세 되신 증조할머니는 “내 딸 사랑해, 얼른 일어나. 이따 집에서 보자~”하시며 어머니를 놓지 못하셨다. 본인의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주중에는 어머니 집에 오셔서 새벽밥을 챙겨주셨던 백발의 엄마이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에 적어도 “잘못해서 죄송해요,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하는 가족은 없었다. 이런 얘기를 나누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살아있는 의식에서 이렇게 가족들의 손을 맞잡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건 아니다.
죽음이라는 것도 처음이고 장례라는 것도 몰랐던 스무 살 때 나의 첫 장례식이 우리 엄마였다. 심장마비로 타지에서 바로 돌아가셨기에 임종도 지켜볼 수 없었다. 삼촌이 “너 어디니, 왜 안 오니. 엄마 죽었다.”라는 전화를 받고 달려간 장례식장엔 이미 사람들이 많이 와 있었다.
엄마의 장례식의 기억은 차갑다. 가장 추웠던 2월이다. 오히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눈물도 안 나온다. '엄마가 죽었다. 이제 엄마의 고통이 끝났구나.' 스무 살인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관을 붙잡고 “가지마 ~~가지마~~”대성통곡을 하는 건 드라마 속의 일이었다. 엄마의 장례식장엔 정적이 흘렀다. 고통의 끝을 잡고 사느니 죽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처음 해봤던 것 같다.
아이가 “할머니, 끝까지 버티세요.” 했을 때, 증조할머니가 “이따 집에서 보자” 했을 때, 마음으로 뭔가 따뜻한 기운이 싹 퍼졌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도 이런 말을 할 수 있고.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사랑의 또 다른 얼굴이다. 떠나는 사람도 남아 있는 사람도 자기만의 태도로 살고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게 궁금해졌다. 어떤 태도로 살 때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