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앤포레스트> 꿈지기의 공감노트
프롤로그 : 남한산성을 선택한 이유
결혼 후 인천에 살다가 아이들이 초3, 초5 2학기 때 남한산성으로 이사했다. 남한산성에는 큰형님(신랑의 여섯살 차이나는 큰누나) 가족과 요양차 이 곳으로 오신 시어머니가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시어머니가 키워주셨기에 암이라는 큰병이 아니였더라면 아마도 인천에서 지금까지 같이 살고 있을지 모른다.
어머니가 이곳으로 오시고 아이를 돌봐주는 이모님에 의지하며 아이들을 케어했다. 이모님을 못 구해서 발을 동동 굴릴 때는 친구엄마에게 부탁하기도 했고 학원선생님에게 맡기기도 했다. 이모님이 계시다고 해서 어머니처럼 전적으로 맡길 수가 없는 상황이라 아이들 옷 입고 등교부터 학원스케줄, 반찬거리 준비등 야근하는 디자이너 생활과 병행하기엔 심리적 부담이 너무 커져만 갔다.
내가 남한산성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건 하루 밤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몇번 남한산성 동네를 염탐하며
"할머니집 근처 숲에 가서 살까?"
“싫어, 난 벌레가 제일 싫어. 절대 안가."
했던 큰 딸이 어느날 밤,
"엄마. 숲에서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아."
그동안 나는 19년 다닌 회사일에 지쳐있었고 주말마다 색채심리 연구소를 다니며 색과 마음의 관계를 공부를 하고 있던 차였다. 워크숍을 통해 나의 어릴 적을 휘집어 바르게 잡아 놓고 파도에 몸을 던지듯이 열정으로 대학생활을 했던 가장 찬란했던 나를 보았다. 제주도에서 만끽한 자연의 깊고 푸름, 잔잔한 바다의 기쁨, 출장 차 갔던 런던에서 하루를 재끼고 과감하게 놀았던 잔디밭에서의 자유로움. 이런 삶의 기쁨을 발견하던 시기와 맞물렸다. 뭔가 창조적인 에너지가 나를 살리는 느낌이었고 자연의 보살핌으로 들어가야 할 것만 같았다.
마음속으로만 장전하고 불발되는 경우가 많은데 딸의 이 한마디가 나를 쏘았다.
가면 되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한달 만에 살 집을 정하고 인천에서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이로써 내게 가장 중요한 심리적 부담이 해결되었다. 산 생활이 힘들어도 회사가 왕복 4시간이 걸려도 서울로 출퇴근이 가능한 버스가 다니는 산성리에 위치했기에 교통은 문제없었다.
큰형님이 소개한 집은 반지하였다. 형님이 사는 바로 아랫집인데 사람이 들어오지 않아 비어있는 상태라고 했다. 산성리에서 가장 큰 평수일 것이고 방 3개 있는 집이 거의 없을 것이라며 우리짐이 다 들어오려면 이정도는 평수는 구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주말마다 낮에도 와보고 밤에도 와보고 몇번을 임장(?)을 했다. 반지하는 무슨......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였고 평수는 컸다. 지하 까페를 하면 될 것같은,,,,,,
하지만 싫지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선 이미 여기가 우리가 살 집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파트에만 살던 나는 밖으로만 나가면 초록초록한 산을 오를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동네가 좋았다. 집주인도 빈집으로 두기는 싫었는지 정말 파격적인 월세와 보증금을 제안했고 우리는 집을 팔지 않고 아파트를 전세를 주고 나왔다.
제일 먼저 거실, 부엌의 조명을 싹 바꾸고 커튼을 달고 도배를 했다. 빛을 바꾸니 정말 까페 분위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눈이 큰 예쁜 아이가 도시에서 전학온다는 소문은 큰딸이 오기 전에 소문이 돌았다. 5학년이 되어 이 산으로 전학생이 오기란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한달 정도 아이들은 호기심에 큰 아이에게 관심을 보였고 아이는 친구들이 신기하게 다 친절하고 좋다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큰 딸은 이사오기 전 친구관계로 힘들어했었다. 4학년 때 매일 우리집에 오던 친구가 5학년이 되자 얼굴이 마주쳐도 모르는 척하더라는 것이다. 하루 아침에 바뀐 태도에 당황스러움과 배신감을 느꼈지만 본인도 왜 그러냐고 묻지도 않았다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딸의 마음에도 다른 곳으로 향한 부름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미 1~5학년때 까지 한반에서 생활하던 아이들은 방과 후에도 새로운 친구와 시간을 내어 놀기보다는 이미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개인적 시간을 즐기는 참한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는 학교가 끝나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가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나는 꼭 아이가 동굴에서 있는 것만 같아서 몇번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지우는 학교생활 너무 잘하고 있어요. 아이를 믿으세요. " 무엇보다 딸은 차분하시고 조곤 조곤하게 설명하는 선생님을 좋아했다. 아이들만을 생각하는 인격적인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 학교의 자랑일 것이다.
지금은 다른 학교로 가셨지만 김보정 선생님은 아직도 아이의 첫 멘토로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다. 하늘마을 (6학년)담임이셨던 박미경선생님 역시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선생님이 되고 싶어했던 나의 꿈이 피어났다. 초, 중, 고등학교 때까지도 나의 꿈의 씨앗은 선생님, 변호사였던 것이 새록새록 기억났다. 상대방을 인정해주고 잠재력을 깨워줄 수 있는 사람. 사실은 내가 인정받고 싶고 잠재력을 발휘하고 싶다는 바램이 그런 꿈의 씨앗을 심은 건 아닐까.
아티스트웨이의 첫 행보를 시작한 곳
남한산성에서의 내 삶을 정성들여 가꾸기로 했다. 언제 이렇게 살아보나 싶어서 나는 주 4일 근무로 바꾸겠다고 요청했고 회사는 허락을 해주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금요일과 주말을 이용해 나는 색채심리 자격증을 땄다.
거꾸로 자화상 미술 수업이 끝나고 김정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아티스트웨이라는 책을 권했다.
"이제 여러분 아티스트웨이 책을 실천해보셔도 될 것 같아요."
아티스트웨이!!! 내 모든 행보의 첫 변화를 이끌었던 것은 이 책으로 부터 시작된다.
나를 위한 12주간의 창조성 워크숍의 부제가 있는 책이다. 나는 아티스트 모임에 가입해 12주 워크숍을 함께 했다. 어디가서 창조성, 잠재력 얘기를 하면 이상주의자라는 말을 들었던 나는 자유롭게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표현할 수 있는 이 공간이 참 좋았다.
12주가 끝나고 몇달 뒤 나는 다른 아티스트 모임을 찾아 12주간의 워크숍을 또 했다. 영어를 잘하는 제시샘은 책의 저자인 줄리아 카메룬에게 직접 코칭을 받는 분이셨다. 아직 현존해 있는 작가에게 직접 전수받은 아티스트웨이의 진행은 어떨까 몹시 기대되었다. 내가 두려운 것에 대해 글을 썼다. 글을 쓰는게 좋다라는 걸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내 안에 이런 욕망이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내 글을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창조성은 건강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치유'된다고 말했다. 나도 치유가 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마음이 열리자 나만의 예술들을 계속 만들어 갔다.
나를 이끄는대로 치료로서의 미술, 거꾸로 자화상, 사유의 사진 찍기, 강사코칭등 나만의 예술들을 계속 만들어나갔다.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될지도 모르지만 한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창조적이고 예술로 치유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바램이 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을.
창조성을 열리게 하는 치유의 공간으로서 숲 forest를 선택하다
나는 키도 아담하고 동안이라 사람들은 내 나이만큼 보지는 않지만 확실히 나이를 먹고 있었다. 나이를 얼마를 먹었건 간에 내가 열정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무엇일까.
나는 마음은 청춘인데 공식적으로는 중년으로 분류되는 나이이다. 심지어 어머니의 납골당이 너무 마음에 들어 나도 저 자리를 미리 사두어야 하나 상조를 가입해둬야하나 고민했으니 말이다.
이 곳 남한산성은 70세가 넘어도 식당의 주인으로 계속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 심지어 딸이 전통조리 자격증을 따고 가업을 이어받으려 하고 바이올린으로 독일로 유학 다녀온 딸이 부모의 식당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집집마다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오는 스토리들이 있다. 엄마의 엄마가 살던 곳에서 여전히 가업을 이어받는다. 산성리, 불당리, 검복리에 친척들이 마을마다 한 집씩 볼 수 있는 남한산성동네. 그래서 정겹다.
"아직도 식당일 하세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 내 손맛을 기억하는 손님이 있는데 할 수 있을 때까진 해야지."하며 할 수 있는 만큼만 , 욕심내지 않고 그리고 즐겁게 일하신다.(아마도 거의 자기의 식당을 갖고 있기 때문일꺼라는 짐작을 한다. 월세비가 안나가는--;;;;) 서울에서도 순대국을 포장하러 오는곳이다. 나이 때문에 무엇을 못한다는 얘기는 없다.
어머니가 난타를 배울 때 나도 같이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배웠다. 그곳에서 식당 주인분들과 웃음치료도 같이 했다. 얼마나 재밌는 분들이 많으신지. 나는 팔이 아파 북을 못 따라 가고 리듬이 기억이 나지 않는데 60이 넘은 분들은 못 해도 덩실덩실, 잘하면 생기가 돌고 이 때 어머니의 얼굴에도 빛이 났다. 결국 나는 마지막까지 하지 못했고 남한산성 축제때 어머니와 그분들은 난타 공연까지 했다. 자기를 표현하고 발산하고자 하는 것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고 멈추지 않는 것이며 멈추어서도 안된다.
남한산성은 가슴아픈 역사가 있지만 100년이 넘은 초등학교와 102년이 된 작은 교회가 있으며 100년이 훌쩍 넘은 은행나무가 있고 .200년된 기와가 숨쉬는 곳이다. 봄에는 벗꽃으로, 여름에는 쉬원한 전나무숲으로, 가을에는 알록달록 단풍잎으로 , 겨울에는 설경을 자랑하는 숲을 보러 사계절이 바뀔 때마다 올라오는 등산객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산을 오른다. 남한산성 '숲' 여기도 삶을 가꿔가는 곳이다.
버스를 탈 때마다 하얀 머리에 노란 스카프에 바바리를 걸친 멋진 노신사분이 있다. 얼굴이 익어서 눈인사에서 시작해 본인의 돌담집을 이 곳에 짓고 유명한 책을 많이 집필하신 건축학과 교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교회가 섬기는 장애인 봉사단체를 도우시는 남한산성에 터를 잡은 한의사도 계시며, 사진을 찍으시는 분, 빵을 직접 굽는 분들, 글쓰는 작가, 서울을 오가며 회사를 다니는 젊은이들 다양한 사람들이 남한산성 '숲'에 살고 있다.
'숲' : 모든 것을 포용하고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공간이다'
숲, 나는 잠시 멈춤의 공간이 아니라 창조성을 발현시키는 안전한 공간으로 선택했다. 어떤 꾸밈 없이 이 공간에서는 자유롭고 나 그대로의 모습으로 아름답다. 숲 어디에 서있어도, 누워있어도 그냥 그 자체로 예쁜 청소년들.
여기서는 그냥 아이가 된다. 나중에 커서도 이 곳, 이 느낌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때 아트앤포레스트 그 곳, '그때 내가 제일 예뻤어'라고 기억되기를 바란다.
21년 10월. 그렇게 아트앤포레스트는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