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
그렇게 몇 주(weeks)를 지연이에게서 벗어나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나니 이제야 머릿속에 다른 일들이 들어올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내 머리를 복잡하게 하려고 찾아온 불청객은 그 여주인이었다. 그 여주인이 지연이의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은 밝혀졌지만 아직 우리 엄마와의 관계는 명백히 밝혀진 바가 없었이 때문이다. (물론 내가 충분히 알아볼 수 있지만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은 기분에 처음부터 사로잡혀 엄두조차 내지 않았었다.) 머릿속에 두 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그 여주인과, 엄마 중에 누구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하는가, 답이 정해져 있는 아주 고마운 질문이었다. 몇십 년을 보지도 못하고 살아온 남보다도 멀어져 버린 동생이라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아끼지 않는 우리 엄마의 그 소녀 같은 마음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엄마에게 먼저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이렇게 결심을 굳히고 나니 다음 생각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하는가? 대뜸 이모로 추정되는 사람을 알게되었늗네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봐야 하는가, 그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물어보면 내가 맡았던 사건의 살인 용의자였었다고 말해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여주인이 이 모이면 본인의 예상대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모습에 엄마는 가슴 아파할 것이고, 설사 이모가 아니라 할지라도 그 여주인의 모습을 보며 어디선가 내 동생도 저렇게 살고 있겠거니 하며 눈물을 흘릴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이 어느 쪽으로 나던 결국엔 끝내 술집을 하겠다고 뛰쳐나간 동생을 끝까지 막지 못한 자신을 자책할 것도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 의문스러웠지만 묻지 않았던 의문 하나가 스멀스멀 고개를 든다. 왜 그 아이의 폭주가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 여주인에게는 다다르지 않았던 걸까? 어쩌면 그 아이도 나처럼 어떤 이유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이미 자신의 아버지와 그 여주인이 아무 관계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 어떤 식으로든지 명분이.. 필요했던 건 아닐까. 아니면 일말의 양심이 있어 무고한(?) 피해자는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걸까.
묻고 싶었지만 정말 피하고 싶었던 답이 없는 이 의문. 알고 싶지 않지만 알 수 조차 없을 그 아이의 마음. 시간이 필요했다.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내 가여운 영혼을 위해 아직은 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미룰 수도 없었다. 나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나보다 더 오랜 세월을 알고 싶어 하며 살아왔을 엄마를 위해. 이모의 마음을.
한 편 나 혼자 그 사람은 이모가 아닐 거라고 단정지은 체 앞으로 살아갈 날들 속에서 엄마 얼굴을 아무렇지 않게 대할 자신이 없었던 것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방볍을 찾아내야만 했다. 그렇지만 이미 과부하를 겪은 지 얼마 안 된 내 머리는 더 이상 복잡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는지 얕은꾀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