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 Jan 24. 2021

어디에 서있어야 할까

"엄마는 일하지 말고 아빠만 일했으면 좋겠어"


첫째 다온이의 말이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평소처럼 "엄마가 일 안하면 다온이 장난감도 많이 못사주고 먹고싶은것도 많이 못사주고..." 하고 구구절절하게 내 직업에 대해 합리화를 하고 있는데 이제 어느정도 큰 다온이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다온이는 섭섭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참을 수 있다는 듯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엄마가 일 안하고 4시에 데리러왔으면 좋겠어"


다시 마음이 무너진다. 내가 7급승진하겠다고 바락바락 복직하는 바람에, 우리 둘째 라온이는 10개월에 어린이집에 입소했고, 다온이는 코로나가 아주 심각했던 작년 한해동안 긴급돌봄, 오후돌봄을 정말 하루도 안빠지고 등원했다. 그래도 너무 고맙게 씩씩하게 등원해준 나의 첫사랑, 진짜 내 영원한 사랑 다온이였는데 무슨일이 있었던걸까. 걱정도 되었다. 요 며칠 평소와 다름없이 5시 반-40분쯤 데리러가면 혼자 덩그러니 남아있는 날들이 있었는데, 늦게까지 돌봄에 있었어도, 같은 반 아이들이 돌봄하다가 다 하원해도, 6-7살 언니들이랑 잘 놀았었는데 진짜 자기 혼자만 남아서 상처가 된걸까. 또다시 워킹맘의 마음은 하염없이 무너졌다.


어디 나만의 일일까. 다온이의 어린이집 엄마들과 얘기하다보면 어린이집 다닐 시절에 방학에 혼자 등원시킨 엄마도 있고 비록 다른 유치원이지만 늘 혼자 남아있는 아이를 픽업하러 가는 엄마도 있다. 이 글을 읽는 일하는 엄마들중에도 분명 있겠지. 그런데 왜이렇게 마음이 무너질까. 요새 유난히 마음이 심란하다.


출근길에 남편에게 "남편, 나 이제 승진에 연연하지말고 웰빙 공무원 할까?" 하고 물었더니 남편은 살짝 당황한듯 "웰빙으로 가면 편하겠지"라며 웅얼거렸다. 허탈한 웃음이 났다. 7급승진에도 그렇게 절절 매던 사람이 갑자기 웰빙공무원을 언급하니 남편이 당황할만도 했다. 난 웰빙공무원으로 앞으로 남은 30년의 세월을 견딜 수 있을까? 동기들이 후배들이 승진하는걸 보면서 내 선택에 후회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 없을것이다." 이건 완전 답정너이다. 그런 승부욕으로 공무원 시험도 붙은 나다.


대학시절, 취업은 당연히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대학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졸업하는 순간까지. 그런데 뭘 해야할지 몰랐다. 영어를 좋아해서 영문과로 입학은 했는데, 도대체가 길이 보이지 않았다. 현실적인 길도 안보이고 내가 뭘해야할지 꿈은 고사하고 어떤걸 하고 싶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저 나는 무조건 졸업전에 취업을 해야하고, 돈을 벌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 다음문도 열린다고 생각했다. 취업을 해야 결혼도 하고 그래야 떳떳하게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그래서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했다. 거기서 마케팅분야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지원했지만, 결과는 완전 참패였다. 몇군데 최종면접까지 갔지만, 굴욕을 당했을 뿐이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벌써 10년도 더 된일인데 기억이 너무 생생하다. 지금은 많이 죽었지만 그당시만해도 심심치 않게 보이던 편의점의 본사 최종면접에서의 일이다.


"자소서가 아주 훌륭해요. 아주 감동먹었다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몸으로 영업 할 수 있겠어?"


너무 당황해서 뭐라뭐라 더듬더듬 횡성수설 대답한것같았는데, 결과는 참패. 불합격이었다. 그 길로 사기업 취업은 포기해버렸다. 포기했는데, 포기는 했는데 갈곳이 없었다. 졸업은 코앞인데, 대학문을 나서서 정말 내동댕이 쳐진 기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랬다. 엄마의 지인이었던것 같다.


"교육청에서 영어강사를 뽑는다던데, 한번 지원해보지 그래?"


그 길로 학교에 기간제교사도 아닌 영어강사로 들어갔다. 정식명칭은 "영어회화전문강사" 2년을 일했다. 첫해는 무난하게 넘어갔는데, 그 다음해에는 멘붕이왔다.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재계약이 될까 하는 불안감, 가족에게 자랑스러운 딸, 누나가 되지 못했다는 실패감에 정신적으로 심각한 혼란이 왔고, 결국 재계약은 되지않았다.


그때는 재계약을 해주지 않은 학교에 모든 관련인사들이 다 원망스러웠다. 내가 들어가서 모든 영어수업을 도맡아하고, 시험문제도 다 출제해주고, 하다못해 영어듣기평가까지 녹음해서 애들 평가도 했는데, 토사구팽도 아니고 사람이 살짝 멘붕이 올수도 있는거지 그동안 해온것들은 생각도 안하고 나를 그렇게 내팽개치고, 내 계약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내 앞에서 다른 영어강사를 뽑는 공고를 내고, 지원자들 면접을 보고. 정말 세상 잔인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고, 평생 잊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너무 서럽고 억울해서 내 자리를 대신할 지원자들이 면접을 보는 그 시기에 화장실에서 숨죽여 울기도 했다. 비참한 마음을 시로 쓰기도했다. 그 시는 지금 어디에있을까.


하지만 지금의 나는 마음에 여유가 생긴걸까. 그 사람들의 입장도 이해는 간다. 어느정도. 이해는 간다. 어느정도. 정말 어디까지나 어느정도. 아직은 시간이 더 필요한가보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를 화상하니 기분이 좀 침울해지는걸 보면.



"서러움은 곧 분노로 변했다."


교무실 한가운데 자리가 있는 나를 하루에도 몇번씩 마주하면서 면접까지 진행한 그들에 행동에 분노한 나는 당장 공무원 시험을 시작했다. 그깟, 공무원, 나도 해버리고 말겠다. 옛날부터 독학이라면 아주 칼을 갈아온나야. 내가 당신을 보란듯이 진짜 올해 시험에 붙어버릴꺼야.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해서 계약기간이 끝나고 집에 쳐박히게 되었다.


그 당시에 우리집은 방이 2개였는데, 성별이 달랐던 동생이 작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방을 내가 차지했다. 공부한다는 이유로. 착한동생은 아무 토도 달지 않고 방을 내주었고, 나는 결심했다. 올해 무조건 붙어버리겠다고. 그렇게 사투가 시작되었다. 계획이 필요했고 분석이 필요했다. 관운이 있었던걸까. 내가 시험을 본 2013년에 내가 응시한 내 생활근거지 지역 교육청에서 행정직을 100명 뽑는다는 공고문이 붙었다. 100명! 게다가 그 전해의 평균 필기점수를 보니 70점대. 이거다. 이정도면 나도 붙을수있다. 남은 기간 4개월. 정말 순공 14시간을 찍어가며 공부했다.


*순공: 순수하게 공부하기


너무 힘들었다. 수능이후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적이 없었다. 대학시절에도 성적이 나쁜편은 아니었지만 주로 벼락치기였다. 하지만 공무원 공부라는게 벼락치기가 될 수 없는 공부였다. 정말 범위가..그 범위가.. 지금생각해도 아찔하다. 사실 범위라는게 있기는 한가 싶다. 영어는 전공이라 어느정도 커버가 되는데, 수능이후 5년만에 쳐다보는 한국사, 국어, 사회 그리고 생전 처음 공부해본 행정법. 하지만..


"어떻게든 해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그리 절실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취업을 하지 않으면 정말 인생이 끝나는것만 같았다. 마치 수능을 망치면 인생이 끝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험생처럼. 그보다 더 절실했다. 그래서 붙었다.



"시험만 붙은게 아니라 내 인생에 자신감도 붙었다."


시험 합격 하나가 내 인생을 완전 바꿔놓았다. 나는 내 생각대로 공무원이 되어서 결혼도 했고, 지금의 천사같은 내 아이들도 만났다. 그런데..어쩌면 내 생각이 틀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요새 든다. 자주가는 지역맘카페에 이런글이 올라왔다.


"워킹맘분들은 나중에 아이들이 크면 자랑스러워하겠지요?"


내용은 이러했다 자신은 결혼하고 경력이 단절되어 집에만 있는데, 지금이야 아이들이 엄마랑 같이있으니까 좋지만 나중에 커서는 애들이 엄마는 왜 직업없어? 누구 엄마는 뭐 한대, 라고 말하면 정말 인생 허무해질것 같다고. 워킹맘들 부럽다고. 그런데 댓글들을 하나하나 읽으면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의 댓글들이 그렇지 않다고. 자신들의 어린시절에도 부모님이 맞벌이여서 학교끝나고 집에가면 아무도 없어서 늘 외롭고 마음이 허했다고, 직업이 있는 엄마도 좋지만 아이들에게는 곁에 있어주는 엄마가 더 좋을거라는 내용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내 어린시절에도 그랬다. 혼자서 두 아이를 건사해야했던 엄마는 늘 일하는 엄마였고, 학교행사, 입학식, 졸업식에도 못올때도 있었다. 다들 가족과 먹는 식사시간에 나는 엄마친구네 가족에 섞여서 밥을 먹기도 했었다. 내 학창시절은. 친구도 없었지만 가족도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강한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너무도 일찍 철이 들어버린걸까. 그렇다고 해서 엄마를 원망한적은 없었다. 참 이상하게도 당연히 와야하는 행사에 당연히 와서 밥먹고 하하호호하는 그들이 부러웠지만, 그렇다고 오지 못하는 엄마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엄마는 일을 하고 있을테니까. 엄마는 우리때문에 늘 힘드니까. 그런생각을 했던것같다. 그런 맥락으로 항상 하교후 텅빈집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것같다.


"다온이는 나와 달랐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기에 어쩌면 작년 한해동안 씩씩하게 유치원등원을 해주는 다온이도 나와 같은 마음일꺼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의 아주 큰 착각이었다. 다온이는 요새 아침마다 "돌봄 간식 뭐싸줄까?"하는 질문에 침울하게 자신이 먹고싶은것을 말한다. 어쩌다 한번 네시에 데리러간다고 하면 유치원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수가 없다. 하루는 네시에 데리러갔더니 유치원 선생님께서 다온이가 아침부터 엄마가 네시에 데리러오기로 했다고 보는 사람마다 이야기한다고 하시는데 정말 내 어린딸이 그렇게 짠할 수가 없고,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우리 아이들을 희생시키는가 하는 착찹함이 밀려들었다. 정말 글로도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뒤덮여 그날밤 잠을 설쳤다.



"나는 어디에 서있어야할까?"


정말 돌고 돌아서 찾은 내 직업이다. 사실 인생사 진짜 한치앞도 모른다고,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내 생에 수학이라고는 돈계산말고는 없을꺼라고 다짐에 다짐을 더했던 내가 평생 회계를 보며 살아야하는 운명에 놓여져서 가끔은 회의감도 들고 한다. 하지만 그런걸 모두 떠나서 직업이라는 자체가, 그것도 공무원이라는 직업자체가 내 삶을 지탱해주고 있는 기둥중에 하나인 느낌이다. 그런데..그보다 더하게 정말 내 목숨같은 내 새끼다. 우리 다온이 라온이. 또 다른 내 삶의 기둥. 두개의 기둥이 알파벳 A처럼 한 지점에서 만나 나를 잘 지탱해주었으면 하지만 지금은 마치  H처럼 평행선을 달리는 기분이다. 내가 죽을때까지 합의점을 찾지 못할 그림이니 결국은 내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가면서 한번은 여기서 치이고 한번은 저기서 치이더라도 버텨내야만 하는 혹독한 운명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답답한 기분이다.



"한 30년 뒤에.."


이 모든 고민이 바람에 흩날려 기억도 안날 만큼 시간이 흐른후에, 다온이가 맘카페에 그런글을 올리는건 아닐까?


우리엄마는 늘 일하는 엄마였어요. 항상 하교하고는 집이 아닌 학원으로 가야했구요. 물론 공무원이라는 직업특성상 주말에는 가족끼리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그 어렸던 유치원시절 돌봄교실에 혼자남아있어야했던것들이 어쩌면 무의식중에 제 삶에 결핍으로 남아있는건 아닐까 생각해요. 그렇지만 저도 어쩔수없는 저희 엄마 딸인가봐요. 이렇게 일하고 있는걸 보면요.


거기에 덧붙여 우리딸이 이런말도 해주었으면 좋겠다.


엄마의 선택을 원망하진 않아요. 우리의 엄마이기 전에 엄마도 그저 한 사람으로서 본인의 삶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겠죠. 라고 말이다.


늘 부족한 엄마인데 바라는것도 많은 엄마.


다음주 월요일 아침이면 나는 또 물을것이다.


"다온아 돌봄 간식뭐해줄까?"


그럼 또 마주하게되겠지. 다온이의 침울한 얼굴. 그래도 다행인건 일단 공립유치원의 방학중 방학에는 우리 다온이를 내가 데리고 있을 예정이다. 물론 학교사정을 봐야겠지만, 일단 방학이니까. 최대한 방학때 혼자 등원하게는 안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방학중 방학에도 도시락 싸서 등원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내가 일을 그만두지 않는한, 혹은 다온이 라온이가 정말 훌쩍 크지 않는한 나는...영원히 고민할것이다. 내가 서있을 자리에 대해서. 그리고 어쩌면 그저 상황이 주어지는대로, 슬쩍슬쩍 이 고민을 외면하면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단지 우리 다온이 라온이가 너무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란다. 그리고 알아주길 바란다. 이런 저런 그 어떤상황에도 나에게는 우리 다온이라온이가 제일 1순위이고, 세상에서 엄마가 가장 사랑한다는것을.  









매거진의 이전글 언제쯤 원없이 먹을 수 있을까(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