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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Jun 17. 2021

신명 나게 한번 놀아볼까?

바야흐로 한 달 전쯤. 어린이날을 기점으로 6-7일 연가를 냈다. 사실 학기 중에 연달아 이틀 연가를 내는 것이 일하는 실장 입장에서는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선택사항이 없었다. 다온이가 다니는 유치원 본관이 공사를 끝내서 드디어 가건물에서 본관으로 이사를 하게 되어 돌봄을 해줄 수 없다는 안내를 받았기 때문이다. 연가를 마치고 출근한 다음 주 월요일 아침. 동기 언니에게서 사내 메신저로 쪽지가 왔다.


"저번 주에 연가였어?"

"네~"

"이틀이나?"

"네, 다온이네 유치원이 돌봄을 안 해준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실장이 좋긴 좋구먼~"

"ㅋㅋㅋㅋ"


허허. 뭐.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동기 언니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왜냐면 무늬만 실장도 실장이라서 연달아 이틀을 쓸 수 있었던 것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교장선생님한테만 양해를 구하면 되니까.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난 실장이니까?



사실 정말로 쉬려고 마음먹으면 충분히 쉴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곳. 교육행정직이다. (나는 교육행정직 외에 다른 직렬이 어떤지는 모르니 여기서는 내가 아는 선의 교육행정직의 복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다. 그리고 나를 기준으로 말할 예정이니 이 글을 읽는 후배, 선배 교육행정직들께서는 "지방공무원 복무에 관한 예규" 혹은 각 본청에서 내려준 "지방 공무원 복무규정"을 참고하길 바랍니다.)


나에게 주어진 휴가는 연가, 장기재직 휴가, 자기 계발 휴가가 있다.


우선 연가. "지방공무원 복무에 관한 예규"에 따라 6년 이상 근무자는 연간 21일의 연가를 쓸 수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나는 지금까지 21일의 연가를 다 누린 적이 없다. 왜냐하면 21일 전부를 받으려면 병가를 미사용 해야 하는데 선천적으로 잔병치례가 많고 열이 잘 오르는 나는 매년 병가를 5일 이상씩 썼다. 그래서 항상 내 연가일수는 20일. 그런데 작년에 "연가 저축제도"가 생기면서 연가를 저축해서 내년에 쓸 수 있다기에 저축했더니 올해는 21일 됐다!


*연가 저축제도 : 공무원은 잔여 연가를 그 해의 말일을 기준으로 최대 10년까지 이월·저축하여 사용할 수 있으며, 저축한 다음 연도부터 10년 이내에 사용하지 않은 저축 연가 일수는 소멸됨


*병가 미사용에 따른 연가 가산

    ○ 질병 또는 부상의 치료 등을 위한 반일연가·지각·조퇴·외출의 누계가 8시간 미만인 경우에도 병가를 사용한 것이므로 연가 가산대상이 되지 않음

      - 다만, 「지방공무원 복무규정」 제7조의 5 제2항의 공무상 병가만을 사용한 경우 연가 가산 대상에 해당됨


다음엔 장기재직 휴가. 장기재직 휴가는 내가 소속한 교육청 지방공무원 복무조례에 나와있는데 이번에 개정되면서 나에게도 5일이 주어졌다. 오호. 진짜 신명 나게 놀으란 의미인가?


*장기재직 휴가 기준                                                                                          

1. 재직기간 5년 이상 10년 미만: 5일

2. 재직기간 10년 이상 20년 미만: 15일

3. 재직기간 20년 이상 30년 미만: 20일

4. 재직기간 30년 이상: 20일


마지막으로 자기 계발 휴가 5일이 나에게 주어진다.

 * 공무원은 업무에 지장이 발생하지 않는 범위에서 연간 5일 이내의 자기 계발 휴가를 받을 수 있다. 다만, 각급 학교에 근무하는 공무원은 학교의 재량휴업일, 개교기념일, 방학 등 휴업일에 한하여 사용할 수 있다.


와. 이쯤 되니 내가 이 모든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면 연가 21일 장기재직 휴가 5일 자기 계발 휴가 5일 - 합쳐서 무려 31일을 놀 수 있네. 1년에 한 달은 놀 수 있다는 말이잖아! 세상에나 이런 꿀 직업이 어디 있어!



여기서 이 글을 마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이제 현실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어디까지나 나의 기준이고 내가 아는 사람들의 기준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로 인한 오해를 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나는 둘째 라온이를 낳고 2020.4.1. 자로 복직했다. 복직 후 2020 회계연도(2020.3.-2021.2.) 내에 단 하루의 연가도 쓰지 못했다. 복직해서 그동안 육아에 전념하느라 잃어버린 감도 찾고, 업무 적응도 해야 했지만 그 모든 걸 떠나서도 내가 지켜본 대부분의 주무관님들이 정말 마음 편하게 쓰고 싶을 때 연가를 쓰는 건 거의 보지 못했다. 게다가 위에 상사가 많은 큰 학교나 기관의 경우 층층이 눈치를 봐야 하니 더 쓰기 어려울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게다가 자기 계발 휴가(학습휴가)는 지금의 학교에 와서 딱 하루를 쓸 수 있었다. 사실 기관 같은 경우에는 학교와는 달리 방학이나 재량휴업일과 같은 제한이 없기 때문에 규정대로라면 자기가 쓰고 싶을 때 자신의 업무에 지장이 없는 한해서 써야 하는데, 모든 직장인들이 다 느끼듯이, 내가 쓰고 싶으면 다른 사람도 쓰고 싶다. 그런데 하필 그 다른 사람이 "상사"나 나보다 경력이 혹은 나이가 많은 동료이다. 이런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면 양보하고 양보하고 또 양보하다 보면 시간은 흐르고, 그러다 보면 또 일이 바쁜 시기가 오고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거다. 쓰지 못한 채.


나는 왜 못썼을까? 일단 남들이 다 여유로울 거라고 생각했던 겨울방학에 나는 미친 듯이 예산 집행률을 높이고 결산하느라 일을 했고 그렇게 겨울방학을 보냈더니 학기 중에는 쓸 날이 없다. 재량휴업일도 없고 방학은 아직 멀었다. 방학 때는 서로 협의를 봐서 최대한 학교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날을 정해 쓰고자 하겠지만, 과연 될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든다.


마지막 장기재직 휴가. 사실 장기재직 휴가는 그동안은 해당이 없었으니까 앞으로 써야 할 일만 남았기에 내 얘기는 사실할 말이 없다. 그런데 주변을 보면 10년이라는 쓸 수 있는 오랜 기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쓰고 지나가는 분들이 너무 많다. 이제는 많이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도 별로 없을 텐데, 그리고 코로나 이전에는 매년 휴가도 갔을 텐데 그럴 때 연가 말고 장기재직 휴가를 쓰면 되는데 잊을만하면 장기재직 휴가 날렸다는 소리가 들린다. 대체 왜 그런 걸까? 나는 앞으로 남은 2년간 나에게 주어진 꿀 같은 장기재직 휴가 5일을 쓸 수 있을까?



보통 공무원 모든 직렬을 통틀어 교육행정직을 꿀 보직이라고들 한다. 수많은 교육행정직 현직자들이 꿀 보직 아니라고, 우리도 힘들다고, 일이 얼마나 많은지, 3원 조직(교사, 행정직, 공무직)에서의 생활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아냐고 외쳐도 아직 많이들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이에 대해 나는 조건적 꿀보직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조건적"을 붙인 이유는 교육행정직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좋은 복지들과 환경에 집중하며 공직생활을 이어간다면 정말 이보다 좋은 직렬이 없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누구나 다 아는 이른 퇴근시간이나 불특정 다수 민원인을 상대 안 해도 된다는 점(이는 특정된 다수의 민원인을 상대한다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그리고 일반행정직들처럼 어떤 사안이 발생했을 때(국가적 재난이나 사건 사고 등등) 긴급 출동(?)을 안 해도 된다는 점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앞에서 장황하게 언급했듯이 나와는 다르게 정말 1년에 한 달은 휴가로 보내는 현직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부러워서 배가 아플 지경이다! 같은 현직자인 나 조차도.  



신명 나게 놀아볼까~! 했던 나의 꿈은 그냥 꿈으로 남겨둬야 할 것 같다.


올해 목표는 장기재직 휴가를 다 쓰고, 자기 계발 휴가를 다 쓰는 것이었는데 둘 다 6월인 지금까지 단 하루도 못썼으니 정말 꿈이 꿈으로 남겨질 확률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이 글을 읽고 "뭐야, 교육행정직 꿀이라더니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방학 때 교사들 다 쉬는데 매일매일 출근해야 하고, 민원 상대 안 하려고 왔더니 학부모들은 어마 무시하게 무섭다 하고, 그냥 일반행정직으로 가야겠네"라고 생각하지 말고, 모든 것에는 일장 일단이 있으니까 깊고 신중히 생각하여 직렬을 선택하길 바란다.


그리고 나도 들은 얘기이지만 요새 들어오는 20대 젊은 현직자들은 개인주의가 일상화라 자신의 일에 지장이 안 가는 선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휴가와 복지혜택을 눈치 안 보고 쏙쏙 잘 누린다고들 한다. 부러우면서도 얄밉기도 하지만(내가 그러지를 못해서 ㅜㅜ)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는 벌써 30대 중반 어쩌면 후반이 되어서 완전한 기성세대도 아니고 완전한 젊은 세대도 아닌 채 그냥 흘러가는 대로 선배들이 하는 대로 끌려가고 있는데, 후배님들이 앞장서서 자신의 권리를 똑 부러지게 누리니 후배님들의 후배님들은 그 닦여진 길로 더 스마트하게 워라벨을 추구하며 공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복무규정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권리들이 잘 나와있다. 사실 나도 규정 찾아봐라, 법 찾아봐라 하면 진저리부터 나는 게 사실이지만 이건 우리를 위한 거니까 한 번쯤 시간 날 때 정독해보길 추천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다온이 임신했을 때 우연히 복무규정을 보다가 "모성보호휴가"라는 것을 찾아서 5일을 다 썼다.)


*모성보호휴가: 임신 중인 여성공무원은 건강관리  태아 보호를 위해 5일의 모성보호휴가를 받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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