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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Sep 19. 2016

나는 서기보(9급)다. 4


[부제 : 개표사무원의 추억]
 
벌써 일주일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흐른 지방선거.
휴일을 반납하고 개표사무원을 하겠다고 말한건,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짧았기 때문에,
안하겠다고 말할 수 없는 상황도 있었지만 내가 속한 지자체의 장을 뽑는 그 역사적인 현장에,
한번쯤은 있어도 충분히 가치 있겠다..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그건 오산이었다. 4일 밤샘작업을 위로(?)하기 위해 교육청에서 5일을 공가처리 하라고 해서, 다행히(?)출근은 안했지만, 정말 거짓말 안하고 하루종일 누워있었다. 온몸이 아주 가볍게 떨려왔다.

아주 미세한 경련이..
정말 몇시간동안 지속되었다.
 
이런 결과를 모르고 있었던 4일 오후 네시.
동기들과 개표장소에서 만나 간만에 본 반가움도 표하고,
그동안 쌓였던 울분도 털어내면서 투표함이 오기를 기다린지 2시간. [사전 교육 시간 포함]
 
드디어 어마어마한 양의 투표함들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개표의 순서는 [개함부]를 거쳐 [분류부]를 지나 [심사집계부]를 통과하면 [확인부]를 지나 [위원검열석-내가 맡은 보직이 여기였다]을 통과해 단상에 있는 [사무국장보조석]에서 최종확인을 마친후 [사무국장]님께 올려지고, 최종적으로 [위원장]이 도장을 찍으면 진정한 유효표로 거듭난다.
 
난 위원검열석이었는데, 이 보직이 말 그대로 비극이었다.
물론 모든 보직이 다 힘들었겠지만, 내가 비극이라는 표현까지 쓴데에는 10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나는 확인부에서 통과된 한 동네의 표들이 모두 담겨있는 바구니를 들고 부위원장님을 포함된 7분의 위원분들께,일일이 확인 도장을 받고 단상에 있는 사무국장 보조석까지 올려줘야했다.
 
12시가 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위원분들이 성격이 좋으셔서,
이런저런얘기도 하고 저녁도 제공받고, 간식도 제공받아서 버틸만 했다. 다리가 조금씩 아파오긴했지만,
그동안 간간히 줄넘기를 해온 효과가 여기서 발휘되는지 위원분들의 농담에 웃음지을 정도의 여유는

남아있었다.
 
그러나 12시가 지나고 1시가 되고,
2시가 될 무렵 우리지역의 모든 투표함이 다 개함되었고, 개함부의 업무가 종료되었다.
쿨하신 사무국장님은 "개함부 수고하셨습니다. 귀가하셔도 됩니다." 두둥..
 
아마 많은 개함부 소속 사람들이 나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겠지만,
정말 부러웠다. 이건 마치..영어회화를 모국어 다루듯이 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내가 느끼는 부러움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아, 내 자리 바로 앞쪽에는 우편투표함이 개함되고있었는데, 그때 잠시 느낀것은 우편투표도 참 많이 하셨구나..우리나라 투표율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이 참 많아도, 그래도 아직까지 이 나라에 조국을 생각하며 소중한 한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더 많구나..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개함이 끝나도, 내가 위원분들께 보여드려야 할 표들은 아직도 수두룩히 남아 있었다.
1시가 지나고, 강한 에어콘바람도 막을수 없었던 땀방울이 이마와 콧잔등에 송글송글 맺히자,
내 얼굴에는 그보다 더 강한 위원분들의 안쓰러운 시선이 하나둘씩 박혔다.
 
위원분들중에 몇분은 나와, 같이 고생하는 주무관님을 위해 선관위 계장님께,
여자 말고 남자로 인력을 더 부탁하기도 했고, 물을 주시기도 했고,농담을 던지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미 나의 체력은 바닥난 상태..
 
잠깐의 쉬는시간동안 아주 상모를 돌리고 졸았던것 같다. [이미 정신은 안드로메다로 여행을갔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내 자리가 부위원장님 옆자리였기 때문에 부위원장님의 한마디가 기억이 난다]
 
"아이고 피곤해서 어떡해..왜 여기다가 여자를 배치해놔서 이 고생을시켜"
 
지금생각하면 민망해서 온몸이 쭈뼛서는 느낌이다. 그냥 엎어져서 잘것을, 왜 꾸벅꾸벅 졸았는지..
 
그렇게 세시가 넘었을 쯤, 모든 표의 분류가 끝나고 또 한번 쿨한 사무국장님의 멘트가 들려왔다.
 
"분류부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야식으로 제공되는 죽 챙겨서 조심히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두둥..이날 우리지역에서 착출된 신규는 나 포함 세명이었는데, 한명은 개함부에서 집에가고, 한명은 분류부에서 집에가고..나만 남았다. 그래서 본의아니게 나는 모든 개표상황을 지켜볼 수 있었고, 마지막까지 그 역사적인

 상황에 산 증인이 될수 있었다.
하하하..
 
처음에는 분류기 돌아가는 것이 신기해서, 왜냐하면 우리가 가볍게 눌러찍은 그 인주만으로 자동인식을 해서

자동으로 타타타타탁 후보별로 표가 분류되는 그 원리가 너무 궁금하고 신기해서 계속 넋을 놓고 쳐다봤는데,

분류부가 퇴근하기 직전에 돌아가는 소리는 정말 내 머리를 흔들어 놓기 충분했고, 속까지 미식거려서 간식으로 나눠준 빵 하나도 다 먹지 못하고 애꿎은 두유만 벌컥벌컥 다 마셨다.
 
그리고 네시..위원분들도 서서히 지쳐갔고, 약간의 분노도..난 느낄수 있었다.
 
*투표권을 행사하는것은 참 보람찬 일이다. 그렇지만 이왕 내가 사는 이 나라의 지도자를 뽑기위해 행사한 투표권이라면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하는데, 일부 사람들은 가 후보와 나 후보의 딱 중간에 찍어놓거나, 멀쩡한 투표란 말고 번호에 찍어놓거나, 아니면 후보마다 다 찍어놓거나 하는 등 무효표와 유효표 그 중간에서 일일이 인편확인이 필요한 상황을 만들어냈고, 개표시간은 점점 늘어만 갔기 때문이다.
 
어쨌든 네시가 지나고 다섯시가 채 돌아오기 1~20분 전, 확인부의 귀가가 이루어진 후 우리의 귀가도 코앞에

다가오고있었다.
 
두근두근..이건 마치, 소개팅이 잡혀서 식당에 앉아 상대편 남자를 기다리는 듯한 떨림이었다.

아마 그보다 더 컸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 환희란.
 
"위원검열석 귀가하세요"라는 말을 듣고 싶었지만, 이미 그때는 마무리 단계였기 때문에 선관위 직원분들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우리는 알아서 죽을 챙겨 귀가해야했다
 
사실 죽이고 뭐고 일단 눕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기 때문에 별로 죽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확인부 주무관님들이 챙겨주셔서 가지고 왔다. 콜택시를 불러 집에 도착하니 날이 밝고있었고, 긴장이 풀렸는지 허기가 급 몰려와서 죽을 반정도 먹고 잤다. 확인부 주무관님이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나의 개표사무원의 추억은 끝이 났다. 그 순간에는 다시는 개표사무원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지금생각해보면 대선이나 국회의원선거때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수당은 12시 이전에는 4만원, 12시가 넘어가면 8만원을 준다. 그리고 개표 참관도 할수있는데 일정시간을

참관하면 수당 4만원이 나가고, 일반인도 개표사무원에 참가할 수 있다.
 
기회가 되면 한번쯤 조금 힘들것 감안하시고 경험하셔도 괜찮으실듯.

마냥 설렜던 순간. 다가올 비극을 모르고 ㅜ. ㅜ
세월이 새삼 느껴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새벽 다섯시는 벌써 날이 밝아지는 시간이었다.

[이 글은 2014년 작가가 쓴 글을 재구성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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