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초행길 트라우마가 생길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초행길에서 생긴 일입니다. 그날은 저에게 참 힘든 날이었습니다. 업체와 코로나19 감염 증세의 악화로 서로 다른 입장을 내세우며 날을 세운 날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그렇게 서로 윽박을 지르며 싸울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그때는 정말 화가 났습니다.
그렇게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 손을 벌벌 떨고 있는 제게 한 선생님이 이런 제안을 하십니다.
"실장님, 수고했어, 밥 한번 먹자"
그리고 며칠 후 선생님들과 진짜 밥을 먹게 되었습니다. 저를 위해 그런 자리를 만들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했지만 한편 걱정도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약속 장소가 제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식당이었기 때문입니다. 긴장되었습니다. 이미 초행길에 칼치기를 당한 터라, 이번에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정말 운전하기가 무서워질 것 같았거든요. 그렇지만 다행히도 아무 일 없이 주차까지 완벽(?)하게 하고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맛있게 밥을 먹고, 더 맛있게 수다 떨고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 그런데 이럴 수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캄캄한 밤에 비 오는 날이라. 그동안 운전하면서 한 번도 마주하지 않은 상황이었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술도 안 마셨는데 대리운전을 부를 수도 없고, 차를 두고 가면 내일 출근을 할 수 없고 선택권이 없던 저는 결국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아주 천천히.. 아주 천천히..(지금 생각해보면 제 뒤에서 크랙션 한 번도 안 울리고 운전해주신 주행자님들, 아니면 묵묵히 옆 차선으로 차선 변경해서 가주신 분들 다 너무너무 감사하네요. 운전을 하면서 이런 사소한 배려들이 얼마나 큰 마음을 먹어야 하는지 알게 되어 열 배로 더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비가 오니 차선이 너무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방 라이트를 켰는데도 보일랑 말랑 하는 차선들 때문에 내가 지금 제대로 가고 있나 하는 불안감이 계속 덮쳐왔습니다. 그 와중에..
"끼익!!!!!!!!!!!!!!!!!!!!!!!!!!"
제 차는 멈춰버렸습니다. 물론 워낙 천천히 달리고 있었기에 사고가 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 놀라 심장이 바깥으로 튀어나올뻔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요?
우회전을 돌기 위해 우리가 다니는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불로 변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서서히 핸들을 돌리는데 제 차 옆으로 사람이 튀어나온 것입니다. 사실 처음에는 사람인 줄도 몰랐어요. 왜냐면 그분은 검은색 후드에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고, 우산도 안 쓰고 있었고,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있었기 때문에 캄캄하고 비 오는 날 밤에 알아보기란 정말 쉽지 않았거든요.
그렇게 저는 멈춰있었고 그분은 이미 빨간색으로 변해있는 횡단보도를 뛰어서 건너갔습니다. 정작 차에 치일뻔한 그분은 유유자적 걸어 제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저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운전을 해야 했기에 다시 집으로 향하는 내내 귀에서 나는 이명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절대 무리하게 횡단보도를 건너지 않습니다. 5초가 남았든 10초가 남았든 제가 뛰어서라도 초록불 안에 건너갈 수 있다면 시도를 하지만 아무리 용을 써도 내가 건너는 도중에 빨간불로 바뀔 것 같으면 애초에 건널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운전자들에게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온몸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놀래서인지 차선은 더더욱 보이지 않았습니다. 신호는 보이는데 차선은 안 보이는 상황. 그래서 한참 가다가 빨간불을 보고 정차를 했는데 정차한 곳이 횡단보도였습니다. 급 당황한 저는 횡단보도 신호등이 빨간불인 것을 확인하고 아주 천천히 후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제 뒤에 차가 한 대도 없었거든요. 그렇게 거북이 기어가듯이 후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제 트렁크 쪽에 큰 충격이 가해졌습니다.
또 놀래서 뒤를 보니 어떤 여성분이 저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정말 사나운 눈으로 보고 계시더군요. 지금도 그 눈빛이 잊히지 않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해보니 제가 후진하던 도중에 횡단보도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고 제가 후진하고 있다는 걸 모르던 그 여자분이 앞으로 가다가 제 차가 자꾸 다가오니까 멈추라고 차를 친 것이었습니다.
너무 죄송했습니다. 놀란 와중에도 너무 죄송해서 고개를 숙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여자분은 제가 고개 숙여 사과한걸 못 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습관적으로 앞을 보고 꾸벅꾸벅했고 그분은 트렁크 쪽에 있었으니까요. 이 글로 다시 사과드리고 싶어요. 얼마나 놀라셨을까요. 제가 놀란만큼 어쩌면 더 놀라셨을 것 같아요.
이 날 이후로는 비 오는 밤에는 되도록 운전을 안 하려고 했고 할 일도 안 생겼어요. 사실 튀어나오는 사람들도 무섭지만 제 스스로 잘 보이지 않는 차선 때문에 운전 자체가 불안하거든요.
하지만 언젠가는 그 누군가가 말했듯이 비 오는 날 한밤중에 시내운전도 가능할 날이 오겠죠? 그럴 수 있는 베테랑 운전자가 되더라도 이 날을 잊지 않고 항상 안전 운전에 힘쓰려고요. 안전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