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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Dec 10. 2021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일까?

나는 직업의 특성상 선생님들이랑 대부분의 일과시간을 보낸다. 내가 대하는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좋은 분들이지만 간혹 나를 너무 당혹스럽게 하는 선생님들도 계신다. 



초임지에서의 일이다. 체육담당의 연세 지긋하고 체격 좋은 선생님이 행정실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와서는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 이제 전지훈련 안가!"


모두가 놀란 눈으로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씩씩대시면서 이런저런 말을 많이 하셨는데 요지는 이러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힘들게 어디 어디까지 전지훈련을 몇 박 며칠로 다녀왔는데 출장비가 너무 적다는 것. 희미한 기억을 뒤져보면 아마 선생님이 다녀오셨다는 곳은 대중교통으로 갈 수 없는 곳이라 왕복 거리에 그 당시 유가를 곱한 만큼 교통비가 나갔던 것 같다. 거기에 일비, 식비, 숙박비도 지급이 된다. (공무원 여비규정)


그런데 뭐가 불만이었을까? 물론 선생님이 사춘기의 아이들을 데리고 그 먼 곳까지 가서 몇 박 며칠을 훈련하느라 고생한 것을 어찌 돈으로 가격을 책정할 수 있을까. 그 고생을 어찌 모르겠나.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대놓고 출장비가 적다고 전지훈련을 못 가겠다니. 


신규였던 나는 꽤나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선생님을 향해 가지고 있던 이미지, 혹은 환상이 깨졌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꽤나 많이 노동의 대가를 철저히 따지는 분들을 마주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든다. 


과연 어떤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일까? 아니 어쩌면 좋은 선생님을 운운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는 걸까? 선생님도 결국 사람이고, 노동자일 뿐인데 직업적 특성 때문에 우리가 너무 오랜 시간 환상을 품어온 것은 아닐까?


나는 유독 선생님들이 정규수업시간 외의 시간에 돈을 따지는 모습을 보면 실망스러웠다. 한 시간 정도 아이들을 더 가르치는 게, 조금 부족한 아이를 도와주는 게, 아니면 그냥 보육 차원에서 데리고 있는 것이 그렇게도 싫은가? 시간 시간마다 돈을 따져가며 자신이 얼마를 받을 수 있는지를 묻고, 예산이 없다면 자신을 할 수 없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표명하는 것이 정말 너무 짜증이 났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본다. 나한테 아무 대가도 없이 한 시간을 더 일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싫다. 더군다나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거라면? 더 싫다. 싫다. 싫다. 같은 맥락으로 선생님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몇 년 후면 첫째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정식 학부모가 된다. 

물론 지금도 유치원 학부모이긴 하지만 유치원과 학교의 무게감은 아주 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이의 미래 담임선생님에 대한 소망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확실히 따지는 선생님도 괜찮다. 

결국 우리는 모두 노동자이고 그 누구도 열정 페이를 강요받기는 싫으니까. 


하지만 아이들을 싫어하는 선생님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가끔 선생님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제 아이들이 징글징글하다고, 혹은 지긋지긋하다고, 시끄러워 죽겠다고, 답답하다고 토로하는 말을 듣게 되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면 저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겠다.. 고 생각이 들다가도 우리 딸 담임선생님이 저런 마을 하면 학부모의 입장에서 상처를 받을 것만 같다. 최소한 선생님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환경이 그럴 수밖에 없으니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고, 아이들이라는 존재를 사랑하는 선생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우리 딸이.


그리고 더불어 속단하지 않는 선생님이셨으면 좋겠다. 

인터넷을 살펴보다 읽은 글이 있는데 너무 충격적이었다. 

아이가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몇 번 등교했는데 그걸 가지고 담임선생님이 아이를 너무 방치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도 이 한겨울에 샌들을 신고 몇 번 등원을 했다. 

그럼 나도 아이를 방치하는 엄마인가? 아니다. 

그럼 왜 아이들이 샌들을 신고 등원을 했느냐? 자기들이 굳이 샌들을 신고 싶다고 했다. 

그럼 막을 수는 없었느냐? 막을 수 있지. 어떻게 막을 수 있느냐면 불같이 화를 내면 된다. 


아침에는 시간이 없다. 아마 일하는 부모라면 이해할 것이다. 아침에 애들 깨워서 밥 먹이고 나 씻고, 애들 세수라도 시키고 옷 갈아입히고 양치시키고 마스크 씌우고 목도리 하고, 아이들 가방 챙기고 내 가방 챙겨서 나오려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이 와중에 모든 준비를 다 마치고 신발장으로 갔는데 아이가 갑자기 샌들을 신겠다고 떼를 쓰기 시작한다. 


당신의 선택은? 

1. 불같이 화를 내서 아이의 고집을 꺾고 우는 애를 원에 들여보내고 출근한다. 

2. 그냥 신고 가게 한다.


나의 선택은 2번이다. 아이를 대화로 이해시키기란 시간이 없고, 굳이 아침부터 서로 감정상 할 필요 없으니 그냥 신고 가게 하는 것이다. 발은 좀 시리겠지. 하지만 어차피 차로 문 앞에 내려주니 발 시린 것도 잠깐이다. 저 글의 주인공인 엄마도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을까? 


저 글을 읽고 생각했다. 이런저런 속사정을 차분히 들은 선생님이라면 저런 속단은 안 했을 텐데, 게다가 가정 챙기랴 내 삶을 꾸려가라 힘든 워킹 부모에게 "방치"라는 예의 없는 말을 쓰다니, 한숨이 절로 났다. 그렇기에 나의 아이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자기 혼자 속단해서 부모나 당사자인 아이에게 상처 주지 말고 차분히 이유와 속사정을 들어주는 선생님이었으면 좋겠다. 




욕심이 너무 과한 걸까?

쓰다 보니 나 역시도 참스승에 대한 색안경 혹은 편견을 못 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학교를 졸업하고 먼 훗날 서로 이름은 기억을 못 할망정 나에게 상처 준 선생님, 나의 자존감을 무너뜨린 선생님, 계산적이고 소리만 지르던 선생님으로 우리 아이의 마음속에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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