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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Dec 29. 2021

협조와 검토 사이, 뭣이 중헌디?

막내로 행정실에서 일할 때는 교무실에 있는 그 누구도 내 결재선에 들어오지 못했다. 그저 나의 결재선에는 행정부장님, 행정실장님, 그리고 교장선생님만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행정실장에 자리에 오자 이제는 나의 결재선에 아무도 없다. 교장선생님에게만 결재를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교무실의 협조를 얻어야 하거나, 교무실과의 협의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에는 결재선이 꽤나 복잡해지는데 나와 교장선생님 사이에 "교무부장" 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이 자리잡기 때문이다. 


 


어제의 일이다. 내년 본예산 편성을 위해 본예산 편성 계획 안을 올리는데 이는 반드시 교무실과 협의를 거쳐야 하는 일이기에 교무부장 선생님과 교감선생님을 결재선에 넣었다. 그리고 다른 일을 처리하고 결재가 났나 하고 보는데 누군가 내 기안문을 고쳤다. 


"누구지?" 바로 들어가서 이력 확인을 해보니 그 주인공은 교무부장 선생님. 그렇다면 무엇을 고쳤을까? 내가 2022년도라고 써야 하는 것을 2021년도라고 작성했고 그것을 2022년도라고 수정해주신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떻게 교무부장 선생님이 내 기안문을 고칠 수 있었지? 분명 협조로 넣었을 텐데...


[여기서 잠깐 협조와 검토의 차이를 설명하자면 협조는 말 그대로 협조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기안(공문을 작성하여 결재를 올린다) 자의 공문을 고치지 못한다. 권한이 부여되지 않는다. 하지만 검토는 의미 그대로 검토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수정(추가, 삭제, 등등)이 가능하다.] 


확인 결과, 내가 급하게 올리느라 교무부장 선생님도 협조가 아닌 검토로 올린 것이다. 그 김에 교무부장 선생님이 고 치신 거겠지. 처음엔 좀 당황했지만 금세 괜찮아졌다. 나의 실수를 키다리 아저씨처럼 고쳐준 것이니 고마워할 일 아닌가. (조금 창피하긴 하지만)


하. 지. 만.


이 "협조"와 "검토"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기싸움을 동반한 괴리감이 존재한다. 



이런 일이 있었다. 


품의(예산을 쓰겠다고 허락받는 공문)을 올리기 전에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예산을 어떠한 사유로 쓰겠다는 내용의 공문으로 사전 결재를 받는다. 한 선생님이 인건비를 어떻게 쓰겠다는 공문을 올렸는데, 나는 결재선에 협조로 들어가 있었는데 인건비 담당 주무관님이 안 들어가 있길래 연락을 했다. 


"선생님, ***주무관님이 안 들어갔어요. 인건비 관련해서는 꼭 결재선에 넣어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결재선이 수정된 공문에는 인건비 담당 주무관님과 내가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결재를 하려는 찰나! 뜨는 팝업 하나. "결재할 수 없는 공문입니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고 바로 날아온 쪽지. 

"실장님 ***주무관님을 검토로 잘못 넣어서 다시 올렸습니다."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검토"로 올렸어도 행정실에서 선생님들 공문에 손을 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꼭 고쳐야만 하는 부분이 있다면 전화를 드려서 설명한 후 직접 고치게 하거나, 직접 고쳐야 하는 사안이 급한일이면 전화해서 이러이러해서 내가 고치겠다고를 양해를 반드시 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선생님들은 "검토"로 올리는 자체도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듯이 꼭 "협조"를 고수한다. 


그런데 이는 행정실 쪽도 마찬가지다. 생각해보니 나도 굳이 교무실과 기싸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생님들(교감선생님 제외)을 결재선에 넣어야 할 때면 습관처럼 "협조"로 넣곤 했다. 사실 이런 것에 예민한 행정부장님이나 행정실장님을 모시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교무부장이 내 기안문에 손을 대게 허용(?)한 나는 엄청나게 혼났을 것이다. (물론 이는 검토, 협조를 떠나서 교무실 쪽에 나의 실수를 드러낸 자체로 혼날 수도 있다.)



이쯤에서 드는 의문은 이거다. 


"뭣이 중헌디?"


도대체 무엇이 중요한 것일까. 거국적으로 행정실과 교무실이 힘을 합쳐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이 최선의 조건에서 최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게 중요하다.라고 누구나 다 아는 원론적인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업무적인 거, 업무외적인 거, 편 가르기, 소수와 다수 같은 많은 것들로 이미 두 부서는 옥신각신, 치고받고 하는 것이 일상인데 굳이 "협조"와 "검토"까지 끌고 와서 기싸움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검토"로 올리면 어떻고 "협조"로 올리면 어떤가"?

물론 행정업무에 대해서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이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거나 훈계를 하면 그것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바로잡아야 하지만, 글쎄, 그렇게 예의 없이 개념 없게 행동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물론 "검토"와 "협조"사이에는 각 부서가 맡고 있는 업무에 대해 서로 존중해주자는 의미도 포함되어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의미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오늘 학교에는 "행정실로의 일방적 업무 이관 금지"에 대한 안내문과 "교원업무경감을 위한 교원업무 표준안 제정 촉구"에 대한 안내문이 날아왔다. 둘 다 맞는 말이다. 행정실로 일방적인 업무 이관은 안될 일이지. 또한 수업에 지장을 받을 만큼 교원업무가 많다면 경감을 해야 하는 것도 맞는 말이고.


그런데 내 눈에 두 안내문 다 "네가 더 일 많이 해라."로 보이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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