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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Feb 21. 2022

끝과 시작이 만나는 시간

2월의 끝자락에서

교육행정직은 2월이 가장 바쁘다. 한해의 끝과 한 해의 시작이 만나는 시간.

그 시간에 마무리와 시작을 동시에 해야 하기 때문이다. 


까딱 정신 못 차리면 실수를 하게 되고, 되돌릴 수는 없다. 

시간은 모자라고 해야 할 일은 너무 많고 누군가가 툭툭 던지는 말은 굉장한 압박이 되어 나를 짓누른다. 


제대로 했는지, 실수한 건 없는지도 검토해 볼 시간도 없이 

마지막 학운위와 함께 정리추경도 끝이 났고, 동시에 통학버스 임차용역 정산과 우유 입찰, 그리고 5개의 유지보수 용역계약을 마쳤다. 이제 숨좀 돌릴까 했더니 다가오는 한해를 위한 통학버스 용역계약이 기다리고 있었고 새로운 회사, 새로운 사장님과 함께 새 출발을 위한 도장을 쾅쾅 찍었다. 


이제 남은 건 막판 예산 집행을 위한 스퍼트.

긴 겨울잠을 자다 나온 듯 정신없는 선생님들을 한 명씩 마주할 때마다 "선생님, 여기 예산 얼마 남았는데 빨리 쓰셔야죠? 쓰실 거죠?"라는 질문을 앵무새처럼 하고 있다. 한 사람에게 한 번씩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얼굴 볼 때마다 해야 한다. 그래서 하고 또 한다. 내가 얼마나 보기 싫을까. 


왜 저렇게 쪼는 거야, 행정실장 완전 꼰대 구만, 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코가 석자다. 나는 집행률 98%를 달성해야 하지만 현실은 95%도 아직 미치지 못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 일주일. 과연 얼마나 쓸 수 있을까?


예산서를 볼 때마다 이게 내 돈이면 좋은 차 한 대만 뽑으면 금방 쓰겠구먼, 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그렇게 한 번에 돈을 쓰기란 쉽지 않다. 한 번에 큰돈을 쓰려면 엄청나게 많은 절차와 서류들, 그리고 미팅이 필요하다. 그래서 요이 땅! 하고 한 해가 시작되면서부터 꾸준히 돈을 쓰는 게 중요한데, 그게 또 쉽지 않다. 학교라는 공간이 돈을 쓰기 위한 공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그랬을까? 이렇게 돈 쓰기가 힘들었을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하필 코로나가 시작되고 예산업무를 하기 시작했기에 목적에 맞게 내려온 돈을 목적에 맞게 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은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현장체험, 운동회, 학예회, 수련회, 수학여행, 소풍, 전시회 등등 사람이 모이는 활동은 거의 모든 것이 제한되었다. 이에 내려온 돈들은 다 학교에 짐이 되었다. 방역 기준에 맞추어 최대한 움직여보려 해도 어느 순간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오면 급격히 엄격해지는 방역정책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그렇게 돈도 얼어붙었다. 


얼어붙은 돈을 깨부수어 잘 쓰느라 모두가 정말 고생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서 정신없이 바빠질 것이 예상되었지만 그래도 며칠은 좀 쉬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 방학은 제대로 쉬지 못했다. 설 연휴가 무척이나 길었지만 연휴는 연휴일뿐 날 위한 휴식시간은 아니었다. 되레 연휴가 끝난 후 출근해서 맞이한 일과가 더 쉼이 되었다. 아이들은 사랑스럽고 그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 역시 사랑이 넘치지만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혼자 무엇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었다. 하루 종일 아이들의 텐션에 맞추다 보면 밤에는 아이들과 같이 잠이 들었고, 어쩌다 새벽에 일찍 눈을 떠도 잠결에서 조차 내 빈자리를 느끼는 아이들이 얼마 못가 깨는 바람에 괜히 하루를 일찍 시작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우울했다. 학교는 숨통은 트였지만 계속 일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몰아붙였고 집에는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이 나에게도 넘치는 에너지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사랑하는 남편이 어쩌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면 그 시간을 최대한 이용해 그동안 못 한 것들을 하며 우울감을 해소해야 했지만 갑자기 조용해진 집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티브이에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출연자가 울면 같이 울었다. 울다 보면 어느새 아이들이 돌아올 시간이었고, 그렇게 또 하루가 갔다. 



꿈을 많이 꾸었다. 무엇을 토해내는 꿈, 죽창 같은 것 수십 개가 찌르는 꿈, 학창 시절로 돌아가 다시 왕따를 당하는 꿈. 너무도 끔찍해서 두 눈을 번쩍 뜨며 잠에서 깼다. 잠에서 조차 나는 소진되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책을 읽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생각을 하며 글을 쓰는 건 할 수 없었다. 할 수밖에 없는 직업으로서의 일은 해야만 했지만 그 외에는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없었다. 


나는 정말 쉬고 싶었다. 


선생님들이 부러웠다. 방학이면 출근하지 않는 선생님들. 얼마나 좋을까.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뒹굴뒹굴 거릴 수 있는 자유. 그래서 한 번은 친한 선생님께 말했다. 방학 때 출근 안 해서 좋겠다고. 그러자 돌아온 답은 이러했다. 


"저는 행정실에서 자기 일만 하는 실장님이 부러워요. 학부모 상대 안 해도 되고, 아이들 상대 안 해도 되고, 복무도 자유롭고."


그래, 모든 직업에는 일장일단이 있는 것이다. 치맛바람에 시달려봤거나 문제아들을 맡아봤거나 혹은 이 모든 것이 아니더라도 요즘 애들은 애들이 아니라는 말도 있는데 학생들을 다루는 것이 순탄하지만은 않겠지. 게다가 수업이 있어서 학기 중에는 연가, 병가도 잘 못쓰는 거 보면 안타까울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도 복무가 자유롭지만은 않다. 선생님들은 학기 중에 불가피하게 복무를 쓰면 다른 선생님들이 대타도 해주고, 전일제 강사나 기간제 교사를 쓸 수도 있지만 우리는 대타도 없을뿐더러 인력이 없으면 아예 자리가 공석이 되어버려 남은 사람들이 독박쓰는 경우도 더러 있다.) 



지금은 새 학기 준비기간이다. 교직원 모두가 나와 다가오는 2022학년도의 정상적인 출발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선생님들 모두가 떠나야 하는 교실을 정리하고 새로 정착할 교실도 정리한다. 행정실 식구들이 겨울방학 내내 기본 세팅을 해왔다면 이제 선생님들이 본격적인 교육의 장소를 만들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새해가 밝은지 두 달이 다 되어가는데 학교의 생리에 따라 나의 새해는 늘 새 학기가 시작돼야 한 해가 정식으로 시작되는 느낌이 든다. 아마 선생님들도 그렇지 않을까. 그리고 학부모들도. 2022년은 어떻게 흘러갈까. 올해 9월이면 우리 학교에 온 지 2년이 된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2년이 되었으니 올해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떠나게 될까, 아니면 우리 학교와의 연을 더 이어가게 될까. 긴장도 되고 걱정도 되는 2022년이다. (보통의 교육행정직들은 2-3년을 주기로 근무지를 옮겨요.)



오랜만에 인사드려요. 다들 잘 지내시죠? 글을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쓰지 못한 날들이 계속 이어져 벌써 2월 말에 접어들었네요. 실장이 되어 한해를 넘기고 두 해를 넘기고 이제 세 번째 해에요. 첫해는 중간에 인수인계를 받아 정신없이 마무리했고, 두 번째 해는 제대로 해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실수투성이었고, 이제 맞이하는 세 번째 해는 이것저것 눈에 보이는 게 많아서 잘해보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니 시작도 전에 번아웃이 온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은 무작정 부딪히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자꾸 소심해지고 겁이 나서 잘 해오던 것에도 주춤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이 시기도 언젠간 지나가겠죠. 곧 다시 돌아올게요. 제가 글을 쓰지 않는 동안 떠난 분도 있지만 여전히 남아주신 분들이 더 많은 것을 느껴요. 많이 감사해요. 구독자분들, 그리고 사랑해 마지않는 작가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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