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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Mar 04. 2022

강의를 하라고요?(1)

새로운 도전

나는 약간 내 신세를 내가 고달프게 하는 경향이 있다. 


얼마 전에 퇴근하던 길에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직업상 많은 업체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많이 오지만, 전화통화를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 잘 안 받는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뒷번호는 몰라도 앞번호는 특정번호로 정해져 있는 교육청이나 교육청 직속기관의 번호이다. (사실 이 특정번호에도 퇴근 이후에는 잘 안 받는데, 정말 급한일이면 문자라도 오거나 같은 직렬에 있는 남편에게 연락이 오기 때문에 더더욱 잘 안 받는다. 그런데 경험상 10번 중에 9번은 급한일이 아니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내가 아는 특정 앞번호.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어쩐지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 받았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연수원에 **주무관입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연수원에서 나한테 무슨 볼일이지?)"

"저번 달에 전문가 강의 양성과정 기본반 들으셨죠?"

"네, (절대 강의가 하고 싶어서 들은 게 아니다. 집합교육연수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런데, 혹시 강의를 좀 해주실 수 있으실까 해서요."

"네?(귀를 의심)"

"세입 강의인데 꼭 좀 해주셨으면 해요."

"네?(나는 세입업무를 우리 학교 와서 아주 일부분만 해봤다.)"

"안될까요?"

"아..(세상에나, 왜 이렇게 간절하고 난리. 안 해주면 울 것 같은 목소리 무엇), 지금 결정 내려야 하나요?"

"아니요, 실장님, 내일 오전까지 답 주시면 돼요. 그리고 실습이 아니고 이론이라 많이 부담 안 가지셔도 되고 전에 하셨던 강사님 자료도 보내드릴 거예요."

"아.. 네.. 그럼 내일 오전에 연락드릴게요."



업무 특성상, 그리고 내 상황상 새 학기가 시작되면 연수시간(60시간, 의무교육 포함)을 채우기가 힘들 것 같아서 겨울방학에 최대한 들으려고 노력했고 집합교육도 그중 하나였다. 사실 위에 주무관님이 언급한 전문가 강의 양성과정 기본반도 신청해놓고 후회했는데, 보통의 집합연수처럼 집합연수여도 강사님의 일방적 강의로 이루어질 줄 알았는데, 웬걸, 중간중간 직접 강의를 해보는 실습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누가 내 신세 스스로 고달프게 하는 스타일 아니랄까 봐. 연수과정을 꼼꼼히 살펴보고 했었어야 했는데 집합교육이라는 말에 무작정 신청했더니 벌어진 참사였다. 연수 시작 하루 전까지도 정말 후회를 했었다. 아무리 줌이라 하여도 어쨌든 남들 앞에서 강의 시연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나는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결론은 잘 지나갔다. 강사님들이 자꾸 뭘 시킬 때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지만 겨우겨우 내 몫을 해냈고, 연수 마지막 날 5분 스피치도 그럭저럭 자유주제였기에 어찌어찌하다 보니 시간을 채운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 진짜로. 겨우겨우 넘긴 연수가 나비효과가 되어 이런 큰 제안으로 돌아오다니.


   


밤새 고민을 했다. 남편에게 상의를 했더니 평소에도 심플한 남편은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고 말했고 나도 그럴까...? 했지만 이상하게 망설여졌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결정을 내리지 못한 체 출근을 했고, 출근하자마자 들려온 한마디.


"실장님, 단재 교육연수원에서 전화 달래요."


오. 마. 이. 갓. 결정을 못했기에 전화를 하지 못했다. 그 상태로 일을 하다 보니 어느새 오전 11시. 전화벨이 울렸다. (기억력이 엄청 좋은 편이 아닌데도 이 직업을 가진 이후로 전화번호 하나만큼은 기억을 잘한다.) 그 번호다. 안 받았다. 다행히 사무실에 아무도 없어서 해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또 그 번호다. 이제는 피할 수가 없었다. 


"여보세요. (알지만 모르는 척)"

"안녕하세요, 실장님, **교육연수원 ***주무관입니다. 혹시 결정은 하셨나요?"

"하하하....(어색한 웃음소리) 혹시 수강자가 몇 명이나 돼요?"

"열세 명이에요. 실장님 부담 많이 안 가지셔도 돼요."

"아..(열세 명..... 열명이 넘잖아. 첫 강의에.. 어떻게 부담이 안되니..) 혹시 6-7급도 있어요?"

"아 잠시 볼게요. 아니요 실장님. 8-9급 있으시고 교육 공무 직분들이에요."

"아...(여기서 갑자기 안도감이 확 들면서, 또 내 신세를 고달프게 할 결정을 하고야 만다.) 그럼 해볼게요."

"진짜요? 와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실장님, 제가 전에 강의하셨던 강사님 자료 보내드릴게요."

"네..(망했다.)"


이렇게 결국 생에 첫 강의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강의가 10일 앞으로 다가온 지금 꿈속에서도 강의 망치는 악몽을 꾸고 있다. 



강사 위촉 공문이 온건 그로부터 딱 이틀 뒤였다. 그리고 공문은 말하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4일 후(바로 오늘!)까지 교안을 제출하라고. 어쩌고저쩌고. 발등에 불이 떨어졌고, 나는 극도로 예민해졌다. 전임 강사분이 했던 자료를 언뜻 살펴봤을 때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내용 같아서 덮어버리고 깊은 절망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진짜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왔다. 이제라도 못한다고 할까? 아니, 그건 곤란하다. 위촉 공문이 왔잖아... 공문.... 이미 수강자들한테 강사 명도 공개되었을 텐데. 진짜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아이고 내 신세야.


남편에게 나 하나도 모르겠다고 어쩌냐고 했더니, 또다시 돌아온 심플한 답변. 모르지 않을걸?

그래서 다시 살펴봤다. 자료도 살펴보고 학교회계 실무 매뉴얼도 보고,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다른 지역 강사님 강의도 열심히 들어봤다. 음..? 실기는 내가 안 해봤으니 못하겠지만 이론은 어찌어찌할 수 있겠는걸..? 

물론 세 시간이라는 게 함정이긴 하지만, 어찌어찌하다 보면.. 되지 않겠어...?


그래서 만들기 시작했다. 교안. 진정한 강사는 PPT에 키워드만 딱 놓고 말로 설명해야 한다지만 난 초짜니까 PPT에 글자 잔뜩 넣기. 오죽하면 남편이 너무 글자가 많은 거 아니냐고 했지만, 내가 제출한 교안으로 교재를 만든다고 하니 교재에 너무 키워드만 있으면 그것도 이상하잖아..? 그리고 유튜브에서 강의하신 분들도 키워드만 딱 있지 않더구먼..? 하며 자기 합리화를 하며 만들었다.


오늘 점심 먹고 제출할 예정이다. 과연 연수원 담당자님의 반응은 어떨까...! 걱정에 걱정이다. 


 


수강생 중에 6-7급이 없다는 말에 혹해서 강의를 한다고 했지만 생각해보니 차라리 6-7급이면 나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왜냐면 세입업무가 보통 교육 공무 직분들이나 8-9급의 저경력자들이 하기 때문에, 진짜 공자(실무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격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입업무를 해온 사람들도 막상 이론 강의를 하려면 막막할 수 있는데, 나 같은 경우에는 8-9급 때 계속 큰 학교에서만 근무해서 다 교육 공무 직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세입업무를 한 번도 해보지 않았고 지금은 실장의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극히 일부분의 업무만 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헤딩 중이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교안도 나왔으니 내가 살길은 연습에 연습뿐.

그리고 솔직하게 이번 기회가 더 부담이 되었던 건 이번 강의를 통해 나에게 새로운 길이 열리느냐, 막히느냐가 결정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무난하게 잘하면 앞으로 더 연락이 올 수도 있고 진짜 제대로 말아먹으면 다시는 연락이 안 오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공직생활을 하다 보면 우물 안 개구리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물론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다양한 방면으로 커리어를 쌓으며 다채롭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정말 정체된 기분이다. 아마 공무원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결혼을 하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첫째가 생겼고, 지금은 사랑스러운 둘째까지 있는 상황에서 계속 출근, 퇴근, 육아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면에서 봤을 때는 이번 기회가 참 귀하긴 하다. 내가 주로 하는 업무와 관련된 강의였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제는 무를 수도 없으니, 초짜 강사 힘을 내보려고 한다. 



이 글에 (1)이라고 순서를 붙인 건, 연습을 하는 도중에 느낀 점들을 기록할 수도 있고 진짜 강의를 한 다음에는 후기는 꼭 작성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에는 안 그래도 정신없는 일상에 강의 준비까지 한다고 정말 눈이 돌아갈 지경이라 글도 잘 못쓰고 책도 잘 못 읽지만 그래도 최근에 나의 브런치 북 완독자가 두 명이나 늘은걸 보니 누군가에게는 나의 글이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다행이다. 



[브런치북] 누가 교행직을 꿀이라고 했나 (brunch.co.kr)

[브런치북] 나는 교육행정직 공무원이다. (brunch.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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