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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Dec 14. 2021

데굴데굴, 학교 굴리기

나는 왜 일을 하는가?

근평 시즌이다. 근무평정. 반기별로 우리는 근무평정을 한다. 이 근무평정은 우리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도 되고, 현실적으로는 성과급이나 승진의 토대가 된다. 근무평정 자료를 작성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일하는가?

몇억이나 되는 학교 예산을 바등바등 집행해온 지난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치자 뭐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나에게 있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딱 하나이다. 


"학교는 굴러가야 하니까, 데굴데굴 데구루루"


그렇다. 학교는 전쟁이 나도, 나라를 빼앗겨도, 그리고 지금처럼 역대급 전염병이 돌아도 굴러가야 한다. 교육을 위해서. 거국적으로 말하자면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근본적으로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내가 일하는 것이다. 우리가 일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하고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은 마스크를 쓰고 꼬박꼬박 학교를 나온다. 



올해 초, 가슴이 지글지글 타는 느낌이 들었다. 밑바닥부터 참아온 화가 용암이 되어 마음을 맴맴 돌다 결국 참지 못하고 터져버리겠다는 듯이 연기가 솔솔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발령을 받아서는 미친 듯이 돈 쓰느라 힘들었는데, 쉴틈도 없이 결산과 2021년을 위한 예산 수립, 용역계약, 학교운영위원회 구성까지.. 일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용암보다 더 붉은 눈물이 바깥으로 흐르려는데,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그래, 조급한 마음을 내려놓자. 지금부터 나의 목표는 2021년 학교가 굴러가게만 하면 되는 거야. 기본 세팅해놓고 부족한 게 있으면 차근차근 채워나가야지.


찬물을 끼얹은 듯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 마음이 또 흔들거리기 전에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다시 일에 착수했고, 잘했는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어느새 2021년이 끝나가고 있다. 학교가 2021년 한 바퀴를 어찌어찌 굴러 종착지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데굴데굴 데구루루.



이 자리를 위해 면접 봤을 때 말했던 것처럼 청렴한 마음으로 국민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공무원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솔직하게도 난 그런 공무원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공금횡령이나 복무위반 등 법에 위반되는 것으로 따지자면 청렴하기 그지없지만 어찌 청렴이라는 것이 거기에 국한되어있을 수 있을까. 청렴이란 공금으로 구입한 학교의 휴지 한 장도 아껴 쓰고, 볼펜 한 자루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사소한 실천부터 어떤 일을 추진할 때 교육의 주체인 학생들의 입장에서 최선의 방법을 늘 강구해야 하는 큰 범위까지 다 아우르고 있을 텐데. 


또한 헌신적으로 봉사하기에는 내 삶부터가 버겁고 나만 바라보는 내 새끼들 챙기기에도 급급한데 국민을 생각할 틈은 있지도 않은 것 같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업무에 충실하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법 위반하지 않고 성실하게 출퇴근하고자 하는 게 나라는 사람이다. 어딘가에는 진짜 청렴의 정석인 공무원과, 봉사의 정석인 분들도 계실 것이다. 그런 분들은 진짜 존경한다. 



"와~실장님 진짜 품의 결재만 나면 바로바로 주문하시는 거예요? 어제 결재 났는데 오늘 왔어요. 대박 빨라"


한 선생님이 교무실에서 커피 한잔하려고 원두를 갈고 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수업에 필요한 건 빨리빨리 해야죠."


드륵드륵 잘 갈린 원두로 커피를 진하게 내려가지고 내 자리에 앉아서 생각한다. 


'오늘도 학교를 잘 굴러가게 했구나.'

'선생님들이 사달라는 수업 재료 제때제때 잘 사주고, 학교 시설물에 하자가 있으면 조치하고, 필요한 비품이 있으면 그것도 구입하고, 가계부 잘 맞추고.'


그럼 됐지 뭐, 학교만 잘 굴러가게 하자. 일단 굴러가는 게 중요하니까.



근평 자료를 다 작성했다. 내가 하반기 동안 해온 일들을 스스로 죽 나열하고 나니 민망하기도 하고, "공사 계약 몇 건"이라는 여섯 글자를 쓰기까지 얼마나 많은 소통과 회의와 고뇌가 있었는가를 생각하니 허탈하기도 하다.(마음 같아서는 모든 과정을 나열하고 싶다. 아마 더 많이 고생한 분들은 더 그런 생각이 들겠지.) 몇백 건의 결재와 함께 몇억의 예산을 집행했지만 건수와 금액으로만 평정받는 시스템이 야속하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마음을 비운다. 최근에 어떤 브런치 작가님 글에서 직장에서 뭘 기대하면 안 된다는 글을 읽었다. 직장은 나의 가치를 발견하고 잠재성을 키워주는 곳이 아니라 나의 노동의 대가를 지급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이 있을까. 


근무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급여가 연체되거나 미지급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새해가 곧 머지않았다. 이제 결산과 예산 수립이 또 몰아칠 것이다. 그전에 집행 막판 스퍼트를 해야 할 시기이다. 이번에는 조금 일찍 마음을 다잡아 본다. 


"나의 목표는 학교가 큰 차질 없이 굴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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