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숙 에세이
친정엄마는 나에게 수필 책을 읽기를 꾸준히 권하셨다.
그래서 소속되어있는 지역 문학회에서 내로라하는 작가님들이 출간한 책을 몇 권씩 가져다주셨지만 쌓아만 놓고 읽지 않았다. 수필을 쓴다는 사람이 수필을 읽지 않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물론 전혀 읽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서점에 진열돼있고 소위 베스트셀러라는 책들은 읽었다. 책의 내용과는 상관이 없지만, 나 스스로가 유명세가 있고 작품성이 있는 책들만 책으로 간주하고 읽어왔던 것이다. 그 틀 안에 갇혀서 말이다.
한 번은 어떤 작가님께 내 글을 내보일 기회가 있었다. 자신이 아는 문학지에 실어줄 테니 글을 보내라 해서 보냈지만 "신변잡기"라는 평이 내려졌다. 물론 내 글을 대놓고 신변잡기라고 한건 아니지만 유독 저 단어만 눈에 띄었다. 신변잡기라니. 각오는 했지만 사실 속상했다. 혹평이 처음은 아니지만 늘 처음처럼 무너져 내렸다. 글이 쓰기 싫었다. 신변잡기. 수필이라는 게 결국 신변잡기 아닌가? 하는 어이없는 반발심도 들었다. 수필에 신변잡기가 빠지면 글이 돼? 수필이고 에세이고 결국 다 신변에 대한 잡스러운 이야기를 고급스럽게 포장해서 내 논거잖아. 하는 철없는 생각이 자꾸 솟구쳐 마음이 분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서는 안되었다.
마음을 다잡고 수필로 문학상을 섭렵한 사람의 책을 읽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그리고 집어 든 책이다.
나는 책을 볼 때 작가 소개를 유심히 읽는 버릇이 있다. 사진도 유심히 보고 어떤 작품을 냈나, 상은 어떤 걸 받았나 꼼꼼하게 읽어 내려간다. 어떤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옛날부터 그래 왔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강렬한 빨간 겉표지를 넘기니 [정명숙] 작가님의 약력이 보였다. 훌륭한 작가님이시다.
하지만 별 기대 없이 책장을 넘겼다. 사실 기쁜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기대가 자라날 틈도 없었다. 내 글은 신변잡기니, 이런 훌륭한 작가님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지 봐야겠다! 하고 어금니 꽉 깨물고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래, 표현 그대로 몽글몽글해졌다. 내 글을 평하신 작가님이 굳이 신변잡기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내 글이 너무 길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수필에도 기승전결이 있고, 작가가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이 결론에는 나와야 하는데 내가 나의 이야기를 너무 길게 풀어헤쳐놓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신변잡기로 흐를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정말 A4 한 장 정도의 수필이 무려 44편이 실려있었다. 짧아진 만큼 편수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 A4 한 장. 늘 칼럼을 써서 낼 때도 A4 한 장이 나를 괴롭히는데 이번에도 그 분량에 발목을 잡힌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점은,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 얘기만 썼다면 [정명숙] 작가님은 바깥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이야기로 들어와 다시 바깥으로 가서 마무리를 짓거나, 혹은 반대의 패턴으로 집필하시거나 한다는 것이다. 즉 바깥의 이야기와 작가님의 이야기가 조화롭게 이루어진 느낌을 계속해서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독자인 나로서는 바깥 이야기보다는 작가님의 이야기가 더 눈에 쏙쏙 들어왔지만 말 그대로 수필도 일기가 아닌 작품이기에 작가 개인사만 줄줄 풀어놓는다면 하소연이나 푸념을 글로 풀어낸 것과 뭐가 다를까. 나는 이상하게 칼럼을 쓸 때는 나름 바깥 이야기와 내 이야기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는데 정작 글을 쓸 때는 그걸 까맣게 잊어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여기서 반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변잡기식 글쓰기 버릇이 고쳐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 신변잡기란 단어를 대체 몇 번이나 쓰는 것인가.
의지와 상관없이 삶의 정점에 다다라 무너져 내리는 육체와 정신은 누구라도 결코 원하는 일이 아니다. -
[불편한 진실] 178p
본인도 노년의 길로 들어선 작가가 친정엄마를 모시고 여행을 떠났을 때를 회상하는 글 [불편한 진실]에 나오는 구절이다. 이 책에는 작가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꽤 많이 담겨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글을 읽어 내려갈 때 마음이 가장 욱신거렸다. 친정엄마가 생각나서이다.
어느새 60 중반이 되신 엄마는 동네 통장을 역임하고 계신다. 쓰레기봉투도 돌리시고, 지역신문도 돌리시고, 쓰레기도 주우시고 정말 공무원이 따로 없다. 그런데 하루는 엄마가 통장들이 받는 교육이 있는데 노인복지회관에서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러면서 스마트워치를 보여주시면서 오늘은 이걸 배웠다고 설명하시는데 머릿속에는 "노인복지회관"이라는 단어가 계속 맴돌았다.
'우리 엄마가.. 노인이 되셨구나.'
나이로는 이미 당연히 노인에 들어섰지만 엄마가 진짜 노인이 되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노인은 말 그대로 허리도 굽고 머리도 정말 하얗게 샌 그런 모습 이어야 하는데 우리 엄마는 아직 허리도 안 굽으셨고 머리도 많이 새지 않았으니까, 라는 유치한 변명을 하고 싶지만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다온이 라온이가 태어나면서 엄마가 할머니가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는데 왜 노인이라고 생각하니 왜 이렇게나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지는 걸까. 엄마의 나이가 이쯤에서 멈췄으면 좋겠다. 노인이라도 좋다. 지금 딱 육십 중반 노인에서 젊어지는 건 바라지도 않을 테니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대로 엄마의 육체와 정신이 무너져내리는 순간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깐이면 닿을 수 있는 바다가 너무 멀다. [홍게] - 188p
서글퍼서 기억에 남는 구절이다. 어쩜 우리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홍게처럼 누군가에게 잡혀서 어디에 갇힌 것도 아닌데 우리는 '일상'이라는 감옥에 갇혀 잠깐이면 닿을 수 있는 바다로 가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심해해서 제 삶에 충실했던 홍게가 자신을 따라다니던 말들을 온몸에 두르고 붉은 단풍으로 저물고 있다. 관광객의 왁자한 흥정에 조용히 눈을 감는다. 잠깐이면 닿을 수 있는 바다가 너무 멀다. 노을이 내려앉은 금빛 물결이 몹시 그립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홍색을 버리지 않는 대쪽 같은 꼿꼿함이 서늘하다. - 188p
결국 문단을 다 썼다. 쓰면서 다시 한번 느낀다. '홍게'라는 단어를 '나'라고 바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음을. 이런저런 나를 향한 말들, 내가 했던 말들을 온몸에 두르고 붉은 단풍으로 저물 어느 순간에.. 장례식은 어떻게 할 것인지, 부조금은 얼마를 해야 할지 등등 내 죽음을 두고 왁자한 사람들의 흥정에도 나는 조용히 눈을 감겠지. 잠깐이면 닿을 수 있는 바다가 사는 동안에는 왜 이렇게 멀게 느껴졌을까. 노을이 내려앉은 금빛 물결이 몹시 그립다.
수필의 참맛을 알게 해 준 정명숙 작가의 [틀]
수필작가를 꿈꾼다면, 혹은 수필작가로서 한 발자국 더 나가고 싶다면 추천하고 싶다. 더불어 나는 당분간 수필집을 많이 읽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