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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Mar 31. 2022

그대 꽃처럼 내게 피어났으니

이경선 시집

'가끔 숨이 턱 막힐 때가 있습니다.

탁탁, 두드려 봐도

연심

가시지 않던 밤이 많습니다.'


2021년 8월 이경선



나에게도 그런 밤이 있었다. 숨이 턱 막히고 가시지 않는 연심 때문에 잠 못 이루던 밤.

그런 밤일 때면 펜을 들고 종이에 시를 적곤 했다. 나는 시라고 부르고 남들은 뭐하냐고 했던 그런 글들을

깨끗한 종이가 아니어도 이미 새겨져 있던 글씨를 여기로 저기로 피해 다니며 꾹꾹 눌러 담았던 시절 말이다.


시절은 세월 따라 흘러가고 그만큼의 시를 잊은 시간들이 쌓여갔다.

글을 쓸수록 시는 그 무게를 더해갔고, 결국 쓴다는 행위조차 읽는다는 선택까지 놓아버렸다.

작년 언젠가, 나의 글을 읽어보신 대문호께서는 "너의 수필은 시에 가깝다."라고 하시며 두 길을 다 잘 살려보라고 하셨지만 슬프게도 그건 세월이 오랜만 큼 다 지우지 못한 미련과 아직도 제대로 발을 들이지 못한 서툴음이 볼썽사납게 뒤섞인 결과였을 뿐, 그분의 넓은 마음이 순수하게 건네신 어떤 가능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여전히 내 책장에는 수많은 책들에도 시집은 몇 권 없다.



그런데 한 작가가 마음을 흔들었다. 무려 시를 쓰는 작가였다. 브런치 메인에 뜬 그의 작품을 보고 눈이 번쩍 뜨여 작가의 브런치에 들어가 몇 편을 더 읽고 망설임 없이 구독을 눌렀다.


사진을 보아하니 나보다 어릴 것 같은데 시 한 편, 또 시 한 편 읽어 내려갈 때마다 어쩌면 극강의 동안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물었다. 몇 살이시길래..., 한 세상 다 살아낸 감성을 가지고 계시냐고. 답이 왔다. 내 동생보다도 어린 나이.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리고 이 설레는 어지러움은 그의 책을 읽는 내내 이어졌다.

예쁘다. 또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참 예쁘다는 마음이 들 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기니 작가의 친필 서명이 보인다. 웃음이 났다. 참 익숙한 남자 글씨체다. 나의 남편에게서 보았고 내 동생에게서도 보았던 그런 필체. 시를 적고, 시로 말하는 시인이지만 그에 앞서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연인이겠구나, 하는 생각에 어려운 마음을 조금 덜고 가벼운 마음을 얹어 기쁘게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그분은 같이 안 왔어요?"

"아, 아니요"

"참, 고왔는데"


아주머니의 인사말이었다. 작은 대화 하나에 한참이나 마음이 휘청였다. 

비가 내려서 일까 소주는 꽤나 달았꼬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술잔을 비워내고 이어지는 망상 속에 당신이 있었다.

나는 장난기 어린 웃음으로 당신에게 말했다.


"아주머니가 글쎄, 당신 정말 고왔다고 하시더라."


-비 오는 밤, 당신의 미를 생각했다 中-


내가 갓 이별을 한 것처럼, 아니면 작가의 이별을 곁에서 지켜본 것처럼 마음이 아려와 시를 한번 읽고, 한번 더 읽었다. 가끔은 나의 상처가 누군가의 입에서 그 모습을 날것으로 드러낼 때 비로소 그 상처를 제대로 마주하게 되는데, 가슴이 더욱 아픈 건 그것이 오롯이 남겨진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나를 그리워하지 않을 사람에게 이 모든 것은 존재조차 희미할 것이기에 이 글이 더 애잔하게 다가왔다. 만약, 시인의 일이라면 아무 말 없이 소주 한잔 따라주고 싶은 마음이 한 병 가득이다. 


1장의 [피고 지는 마음]이 지나가자 2장의 [그대가 피었다]가 시작되었다. 

시집의 표지만큼 반짝반짝하고 예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2장의 모든 시가 자신의 이야기 마냥 가슴에 콕콕 별이 되어 남았겠지만, 솔직히 나는 가슴 설레는 사랑보다는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과 남은 생을 굳건히 걸어가야겠다는 믿음의 단계에 와있다. 그래서 훗날 내 딸이, 혹은 아들이 만났으면 좋겠구나, 하는 마음으로 시인이 노래한 사랑의 시들을 읽어 내려갔다. 


별빛 아래 나는

'그대만치 빛날 것 없다'

생각도 하였다


달도 별도 숨어

단 하나 빛나고


나는 이를 

사랑이라 하였다


밤하늘이 밝다


겨울밤의 그대 中


달도 별도 숨어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사랑이라니. 그것도 겨울밤에. 사랑은 참 위대한 것이다.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든 친구 간의 사랑이든, 혹은 그 밖에 굳이 말로 정의 내릴 필요 없는 관계에서의 사랑이든. 사랑은 숨는다고 그 존재를 가릴 수 없는 존재조차 숨는 것 같이 느껴질 만큼 커다랗고 귀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이가 시인이 시에서 말한 것과 같은 사랑을 하기를 바란다. 


사랑이 피기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꽃이 피면 지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오듯, 시집에서도 사랑은 저물고야 말았다. 3장 [그대가 저문다]는 이별을 껴안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의 아픔이 한 장 한 장마다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 그댈 생각함은


한 마리 새끼 짐승의 울부짖음 같이

그리 사무치고 애틋한 것이다


새끼의 세상 어미뿐이라

울음으로 찾아 헤매듯


나의 세상 그대뿐이라

그댈, 목 놓아 부르짖음이다


그댈 생각함은 - 153p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어미"의 입장에서 아직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작가가 약간은 경솔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쓴 것처럼 새끼의 세상은 진짜 어미뿐이기 때문에 이것은 생존이고, 본능이고, 그 어떤 것보다도 절실한 사랑이다. 남녀 간의 사랑도 물론 얼마든지 우주를 뒤덮을 만큼 절실할 수 있지만 과연 그 절박함이 진정 온 세상이 엄마인 아이에 견줄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이 시가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아이들의 얼굴을 매만질 때마다, 아이들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때마다 이 시가 마음에 둥둥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그 와중에 어쩌다 켠 TV에서 사우디 공주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일반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계속해서 목숨의 위협을 느낀 공주. 결국 동반 도주를 시도하지만 출국 직전에 붙잡히게 된다. 왕은 마지막으로 공주에게 남자와의 사랑을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공주는 결국 죽음을 택한다. 죽음으로 지킨 사랑. 이제 겨우 스무 살이었다는 사우디 공주의 사랑은 도대체 어떤 모양이 길레 죽음도 불사한 걸까. 스무 살이었기에 부릴 수 있었던 치기였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도중 또 작가의 시가 떠올랐다.


그래, 이 정도의 사랑이 마침내 존재한다면 작가가 시에서 부르짖던 사랑 또한 같은 길을 가고 있겠구나. 내가 너무 경솔했구나. 작가가 경솔한 게 아니라 내가 경솔했어. 사우디 공주의 사랑과 함께 오래오래 내 마음에 남을 것만 같다. [그댈 생각함은]



처음 시집을 받았을 때는 고민이 많았다. 나 역시 비공식적으로 시집을 한 권 내고, 공동저자로도 시집을 한 권 냈지만 만족이 없었기에 유독 '시'라는 장르에는 쉽사리 감명을 받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정말 단 한편도 내 마음을 두드리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에서 시작한 독서는 명백한 기우였다는 안심을 주며 끝이 났다. 


실제로 내가 이경선 작가의 [그대, 꽃처럼 내게 피어났으니]를 읽으며 감동을 받아 모서리를 접은 페이지는 이 글에 적은 세편 말고도 여섯 편이 더 있다. 누군가에게는 흔하고 흔한 사랑, 이별 노래처럼 보일 수 있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따뜻하고 애절한 마음이 느껴지는 시집. [그대, 꽃처럼 내게 피어났으니]


그리고 참고로 시도 좋았지만 나는 가장 앞에 적은 작가의 말과, 가장 끝에 적힌 에필로그가 유독 마음에 들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다가오는 봄을 맞아 건네면 따뜻한 선물이 될 시집. [그대 꽃처럼 내게 피어났으니]


당신을 그리는 일이

계절을 지나

여러 해 되었습니다.


저는 아직 거기 있습니다.

당신의 여름날 그 해변 말입니다.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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