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부모의 잘못인가?
사람이 얼마나, 어디까지 가식적일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가식적인 것이 언제나 나쁜 것인가, 하고 의문을 가져본다.
딸아이의 교우문제로 마음고생을 한지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담임선생님의 예의주시 덕분인지, 아니면 담임이 상대방 아이의 부모에게 연락을 취한 건지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요새 딸아이의 입에서 그 아이의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나쁜 얘기도, 좋은 얘기도.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살얼음판을 걷는 듯 불안하고, 걱정되고 심란하다.
특히 놀이터에서, 집 앞에서 그 상대 아이와 그 엄마를 마주할 때마다 복잡한 감정이 든다.
굳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면
딸이 4살 때부터 이어진 인연이니 벌써 4년이란 시간을 알고 지냈고
그냥 인사만 하는 사이가 아닌 같이 웃고 떠들며 보낸 시간이 꽤나 많아 보통 인연을 넘어서는 사이였는데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그럼에도 막상 마주하면 나는 아무런 티도 내지 않는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인사하고 일상을 이야기한다.
나는 가식덩어리인것일까. 아니면 나는 무엇이 두려운 걸까. 혹은 염려스러운 걸까.
이리저리 얽혀있는 관계가 나 때문에 깨질까 봐, 그로 인해 어렵게 지켜온 아이들의 우정도 깨질까 봐.
더 나아가면 결국 다 한동네에 사는 사람들인데 소문이 날까 봐,
혹은 유치원에서 우리 아이가 골칫거리로 자리 잡을까 봐..?
나열한 것들이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지만 굳이 그런 것 때문은 아니다.
내가 그 아이의 엄마 앞에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이유는
서로 기분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도록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만약 나와 그 엄마 사이의 문제라면, 혹은 폭행과 같이 가해사실과 피해사실이 확실한 일이라면
대화하기가 더 용이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 내가 고민하고 있는 상황은
뚜렷한 피해상황도 증명하기가 어렵고 , 자식에 관한 이야기이며,
더 나아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서로의 입장에서 해석하기 시작하면
괜히 싸움만 크게 번질 수 있는 사항이기 때문에 나는 더 침묵한다.
얼마 전에 오랜만에 지인과 이야기할 일이 있었다.
오랜만에 본 지인은 나에게 살이 왜 이렇게 빠졌냐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실제로 나는 최근 몇 달 사이에 몸무게가 3-4kg 감소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고생을 해서"라고 장난반, 진담 반으로 말을 내뱉으니
갑자기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순간적으로 감추지 못한 표정을 감지한 지인은 도대체 무슨 일이 길레
얼굴이 주먹만 해졌냐고 재차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머릿속에서 그만 말하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멈춰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털어놓자 마음이 편하면서도 편치 않았다.
내 마음 후련하자고 모든 얘기를 다 털어냈지만
결국엔 상대방 입장은 알지도 못한 채 내 입장에서 남의 얘기를 한 꼴이었으니. 결코 잘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으니 그저 후회할 뿐이다.
내 얘기를 다들은 지인은 그 상대 엄마와는 얘기를 안 해봤냐고 물었다.
나는 선생님이 예의주시 한다고 하셨으니 나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이번 일을 겪으면서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기력감이 가장 힘들다고
앞으로 학교에 들어가면 더 수많은 일이 닥쳐올 텐데 내가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나의 가장 솔직한 마음이자 생각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몇 년 후
엄마와 어떤 얘기를 하다가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따돌림당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렴풋이 알고 계셨겠지만 확신하지 못했던 엄마는 왜 그 시절에 엄마에게 그런 얘기를 하지 못했냐고
물으셨다. 엄마는 엄마로서 아빠 몫까지 열심히 사시면서 정말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했는데 너희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 같다며 침통해하셨다.
하지만 엄마의 생각은 틀렸다.
엄마가 부족해서, 혹은 아빠의 부재 때문에 내가 나의 처절하게 외로웠던 학창 시절을 털어놓지 못한 건 아니었다. 내가 왕따의 고통을 오롯이 혼자 견딘 이유는 사람 관계, 특히 교우관계는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라면 어느 누가 관계해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생각해보자.
아무리 평판이 좋은 사람이어도 나랑 안 맞으면 나에게 그 사람은 평판이 좋은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아무리 소문이 안 좋은 사람이어도 나와 잘 맞으면 그 사람은 나에게만큼은 괜찮은 사람이 된다.
이처럼 인간관계라는 것이 결국 당사자와 당사자가 마음이 맞아서 잘 지내야 하는 것인데
제삼자가 아무리 나와 안 맞는 사람을 계속 들먹거리면서 "저 사람 평판도 좋은데 너는 왜 그렇게 저 사람과 못지내니, 잘 좀 지내봐"한다고 말한다고 잘 지내게 될까? 턱도 없는 소리다.
이미 내가 왕따가 되었을 때는 우리 반에서, 혹은 우리 학교에서
나와 잘 지낼 마음이 있는 동급생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들의 마음이 돌아섰는데 선생님이나 부모님이 개입한다고 해서 마음이 돌아설 수 있었을까?
1%의 가능성도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전학과 검정고시 같은 차선책이 그때 당시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법들을 제안했다고 해서 그렇게 달갑지도 않았을 것 같다. 결국 내가 패배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뿐이니까.
극한의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부모님께조차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어떻게 부모한테조차 말도 못 하냐고. 하지만 그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앞에서 내가 말한 것처럼 인간관계의 문제는 제삼자가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자녀가 원만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나의 이런 상황 때문에 부모님이 가슴 아파하는 것이 더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나 스스로가 이런 상황에 처해서 죽을 만큼 힘들다는 것을 부모에게 보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이 밖에도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모든 케이스가 부모와의 애착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혹은 부모에게 문제가 있어서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당사자가 아니라면 그 어떤 말도 가볍게 던지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이런 상황에서 부모님들이 "내가 부족해서"라는 이유로 너무 자책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한 번은 친한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오은영"박사님 얘기가 나왔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에게서 문제행동이 나오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그건 아니죠!"라고 했다가 선생님들의 입장이 너무 강경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들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한 생명이 태어나서 어엿한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가 미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마주하는 상황 중에는 아무리 부모라고 하여도 개입할 수 없는, 혹은 개입해서는 안 되는 그리고 알 수조차 없는 상황도 많을 것이다. 교우관계도 그중에 하나일 것이고. 그렇기에 무조건적으로 부모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시간이 한참 흐른 일이라 덤덤하게 그 시절 얘기를 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당시에는 몰라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고, 지금도 자식의 오랜 상처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에
지금 내가 느끼는 것처럼 똑같이 무력감을 느끼셨을까. 그렇다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던 걸까. 나는.
그래도 나는 내가 그 시절 끔찍한 외로움 속에서 공부도 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의 자존감을 엄마가 심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차라리 죽어버려야겠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늘의 별이 되지 않고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게 별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건 엄마가 나의 어린 시절
아빠 몫까지 넘치게 사랑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그 시절 얘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없지만
혹여나 할 기회가 생기면 엄마에게 이런 나의 생각을 꼭 전해야겠다.
오늘 아침에도 딸아이와 문제가 있었던 아이와, 그 엄마를 마주쳤다.
마음이 심란했다. 언젠가는 이 문제를 가지고 그 엄마와 내가 허심탄회하게 말할 날이 올까.
그저 지금부터라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전처럼 두 아이가 사이좋게 지내서 더 이상 이 문제가 수면 위로 안 떠오르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