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출근길, 브런치에서 내가 구독하는 작가님들의 글이 얼마나 올라왔나 "피드"를 눌러보았다. 그때 눈에 띄는 글 하나. 남들보다 조금은 힘이 드는 육아를 하고 있는 엄마의 글이었다. 항상 읽을 때마다 마음이 안타깝고 무거웠지만 오늘은 유난히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남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매거진을 만들어 나의 깊은 상처를 꺼내보이게 된 계기는 바로 나의 트라우마가 우리 딸로 인해 그 모난 모습을 제대로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나이 또래에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렇게 울고 불고 남들에게 성토할 정도의 문제도 아니었지만 그 당시 나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사고가 멈추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성적인 사고는 지나친 절망과 분노에 잡아먹힌 채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나는 감정에 속수무책으로휘둘리기 시작했다. 마치 나의 아이는 내가 어렸을 때처럼 온전한 피해자인 것처럼, 상대 아이는 나를 비웃고 때리고 따돌렸던 동급생들처럼 천벌을 받아야 할 가해자인 것처럼 단정 지어버린 것이다. 아직도 인간관계로 힘이 들거나 업무로 스트레스를 지나치게 받을 때면 그날 밤 꿈속에서 모두가 나를 외면하는 교실을 헤매고 다니느라 고통받는 나는, 꽤 오랜 시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리며 당사자인 딸보다 더 괴로워했다.
이 모든 과정을 다 겪고 나서도 집착을 내려놓기 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이의 입에서 "엄마, 나 이제 00이랑 안 놀아. 다른 친구들이랑 놀아"라는 말이 나와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이와 비슷한, 혹은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똑같이 반응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이것이 내 트라우마가 가져다준 벽이다. 너무도 단단한 그것.
아침에 읽은 글이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혹은 당했던 아이의 엄마가 쓴 글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엄마가 겪는 고통과 내가 겪는 고통의 맥락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엄마는 아이를 향해 의사가 내린 어떤 진단에 의해, 나는 내가 겪은 과거의 상처로 인해 나의 아이를 있는 그대로 혹은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 없는 상황이 정말 아프게 느껴졌다. 나의 사랑하는 아이를,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한 아이를, 그리고 반짝반짝 빛나는 자신만의 보석을 품고 있을 아이를. 어떤 프레임을 씌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우리가 너무 불쌍했다.
여기까지 와서 새삼스럽게 나를 이렇게 만든 가해자들을 굳이 다 끄집어내어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충분히 저주하고 증오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건,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갈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언젠가 불의의 사고로, 혹은 누군가의 악의로 한 순간에 자녀를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이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입법을 추진하고 인터뷰를 강행하는 것을 보며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렇게 한다고 이미 숨을 거둔 아이들이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자신들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데 저게 다 무슨 의미인가.
하지만 이제와 서야 나는 새끼손톱만큼 그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그들은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가여운 나와 너와 모든이들의 마음이 하루하루 아주 조금씩이라도 편안해지기를 기도한다. 울고 싶으면 울어서라도 씻겨내려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