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 Aug 28. 2022

일단 밟아!

초록에서 노랑으로.

 운전을 시작하기 전에는 신호등을 볼 때마다 아무 감흥이 없었어요. 차량 신호등은 저랑 하등의 상관이 없는 존재였고 보행신호등은 아주 단순했죠. 빨간불에는 멈추고 초록불에는 건너면 되니까요. 운전을 시작하고서는 차량신호등도 이제 주시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보행신호등과 원리가 똑같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기에 조금은 쉽게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초보에게 운전과 관련해 쉬운 건 하나도 없더라고요. 제가 처음 차를 몰고 주행하다 교차로 한가운데서 갑자기 노란불로 변한 신호를 보고 당황했던, 그날 이야기를 해보려 해요. 



주행을 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있어요. 초록불에 출발했는데 앞에 차가 줄줄이 있거나, 혹은 줄 서있는 차들 중에 어떤 차의 차주가 딴짓을 하다가 늦게 출발하면 뒤편에 있던 내 차가 분명 출발은 초록불에 했는데 교차로 중간에서 신호가 노란불로 바뀌는 경우요. 지금이야 그런 순간에는 빨간불로 변하기 전에 지나가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주행을 이어가지만 이제 겨우 차라는 물체를 움직이기 시작한 초보운전은 이런 사소한 상황에도 엄청 당황을 해요.


저 또한 그랬어요. 초록불에 출발했는데 교차로에 들어서자마자 노란불로 바뀌는 걸 보고 급 당황하게 된 것이죠. 분명 어느 시절에 "빨간불에는 멈추고, 노란불에도 멈추고, 초록불에는 건너라"는 교육을 받은 것 같은데 지금 내가 이 위치에서 멈추면 어느 방향에서든 사고가 나고도 남을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저로서는 꽤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죠.


내가 누군가에게 신호위반으로 신고를 당하더라도 이 순간만큼은.


일 단 밟자.

그래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쭉 주행을 했어요. 주행을 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사무실에 도착해서 남편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죠.


"남편! 내가 분명 초록불에 출발했는데 가던 도중에 노란불로 바뀌고, 아마 내가 앞 차선 진입했을 때는 빨간불이었는지도 몰라. 이거 신호위반이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거기에 카메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못 봤어. 아오 정말 짜증 난다 운전하지 말까? 운전 안 하면 출퇴근도 안되고.. 신호위반이면 그 뭐시냐 몇 대 중과실로 벌점도 엄청 세고 벌금도 많이 나오는 거 아니야? 진짜 돌아버리겠네."


그러자 남편이 묻더군요.


"초록불에 출발한 거 맞아?"


위풍당당하게 답했죠.


"어, 내가 분명 봤어 초록불"


바로 뒤따르는 그의 아주 심플한 대답.


"그럼 됐어"

"...?"


뭐가 됐다는 거야!? 뭐야 대체, 진짜 나는 속이 타들어가는데. 초록불에 출발했으니 별 문제없을 거라는 얘기야, 아니면 벌금이랑 벌점이 나와도 괜찮다는 얘기야, 도대체 뭐야.


"뭐가 됐다는 거야? 설명을 제대로 해봐"

"진입을 초록불로 했으면 카메라가 있든 없든 법 위반이 아닐 거라고"

"오 그래?"


누가 보면 아마 아주 격정의 모노드라마를 찍는 줄 알았을 거예요. 남편이 위반이 아닐 거라고 말을 해주는 순간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어김없이 꽉 깨물고 있던 어금니가 사르르 풀리며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갔거든요.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어요. 남편의 문장이 "추측형"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검색해봤어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알게 된 사실 중에 당연하지만 조금 놀랐던 건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어요.


황색의 등화: 차마는 정지선이 있거나 횡단보도가 있을 때에는 그 직진이나 교차로 직전에 정지하여야 하며, 이미 교차로에 차마의 일부라도 진입한 경우에는 신속히 교차로 밖으로 진행하여야 한다.

출처: 도로교통법 시행규칙 [별표 2]

 이 시행규칙의 첫 줄에 따르면 신호가 노란불로 바뀌었을 때 교차로에 진입하면 안 되는 거예요. 진입을 하게 되면 "신. 호. 위. 반"인 거죠. 그리고 두 번째 줄에 따르면 저처럼 초록불에 교차로에 진입했는데 중간에 노란불로 바뀌면 빨리 나가는 게 맞는 거였어요.


그날 이후 신호 과속 감시카메라가 있는 교차로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초록불로 진입했는데 교차로를 다 지나가기 전에 노란불로 변한 거죠. 조금 걱정은 되었어요.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그런 느낌 말고(전 이제 그것이 위법행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요), 왜 그냥 감시카메라 존재 자체가 위압적이어서 느끼는 불안감이랄까. 그리고 예상대로 저는 신호위반 과태료 및 벌점 통지서를 받지 않았어요.


이후에 제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이제 노란불로 바뀔 것 같으면 아예 천천히 속도를 줄여서 교차로에 진입하지 않고 정지선에 멈춰요. 가끔 아이들 등원이 늦어져서 저까지 출근시간이 지체되어 도저히 제시간에 사무실에 도착 못할 것 같은 날은 마음속에서 뻗쳐오는 유혹의 손길을 그냥 덥석 잡아버리고 싶지만 대체로 많이 뿌리치려 노력하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노란불이 될 것 같아서 서서히 정지선에 멈추면 크랙션을 누르는 뒤차 차주분들이 있어요. 노란불이지만 충분히 속도를 내면 지나갈 수 있는데 굳이 제가 멈춰 서서 자기까지 지나가지 못했다는 분노를 그렇게 표현하시더라고요. 그러면 저는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도 입술이 바짝바짝 말라요. 이런 경험을 몇 번 하다 보니 가끔은 너무 억울해서 괜히 운전을 시작했나, 하는 회의감이 들 때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포기했으면 제가 지금 이 글을 안 쓰고 있겠죠. 여전히 사나운 크랙션 소리가 들리면 그것이 저를 향하고 있는 것이 아니어도 깜짝깜짝 놀라고 눈치 보느라 눈동자가 쉴 새 없이 돌아가도 어차피 운전을 계속할 것이라면 어깨를 좀 펴야겠다는 생각을 어느 순간 했어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저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정글 속 토끼처럼 구겨져서 운전을 해야 하나, 조금 당당해져도 되지 않을까,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만 계속하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때"를 만난 게 아닌가 싶어요. 그 이후로부터는 애써 의연한 척하게 되었고(뒤에서 크랙션 눌러도 신경 안 쓰는 척 - 속으로는 어금니 꽉 물고 있긴 해요.ㅎㅎ) 그게 습관이 되자 이제는 진짜 "그렇게 당당하면 직접 와서 따져봐"라는 마음까지 조금씩 자라고 있어요. 물론 전제는 내가 당당해야 한다는 거죠.




당당함을 전제로 어깨 쫙 피고 운전한 그날이 조금씩 다가오는 느낌이 들어요. 오늘도 도로 위에서 용기 내보려고요. 아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