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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 Oct 04. 2022

믹서기로 원두 갈기

드립 커피를 향한 열망

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그중에서도 핸드드립 커피를 정말 좋아하는데, 처음에는 물과 커피의 비율이 50:50이었다가 이제는 30:70에까지 이르렀다. 조만간 텀블러가 물 없이 얼음으로 가득 채워진 채 핸드드립 커피 원액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면 나의 행복지수는 올라가겠지만 수면지수는 아주 바닥을 치겠지. 지금도 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런지 머리에 생각이 많아서 그런지 새벽에 늘 깨는데, 어쩌면 새벽에 깨는 게 아니라 새벽에 잠들 수밖에 상황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그런 일만큼은 없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커피가 너무 좋다.


어느 정도냐면 핸드드립을 위해 원두(홀빈) 팩을 여는 순간 팩 안에서 풍기는 향에 온몸의 촉을 집중한다. 코를 통해 온몸으로 퍼지는 원두의 진한 향에 깊은 행복감을 느낀다. 하지만 너무 오래 열어두면 향이 다 날아갈 수도 있으므로 쓸 만큼만 그라인더에 쏟고 꼼꼼하게 닫는다. 그라인더에서 원두가 갈리는 동안 멍을 때리다가 다 갈리면 잠시 뚜껑을 열어 진하다 못해 나를 녹여버릴 듯한 향에 또 한 번 취한다. 하지만 이것도 오래가지 못한다. 진짜 핸드드립을 하는 동안 풍기는 향도 충분히 누려야 하기에 물이 다 끓기까지 향이 날아가지 않도록 뚜껑을 다시 꽉 닫는다.


드디어 핸드드립 시작.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물을 부으면 소위 말하는 커피 빵이 부풀어 오르며 원두 본연의 향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아.. 이게 행복이지 별거 있나. 커피나무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데 어쩌지. 이전에 내가 가장 애정 하는 음식은 우유였는데, 30년간 지켜온 우유의 정상 자리를 단박에 치고 들어온 너란 녀석. 커피. 사라지면 안 된다. 아.. 행복해.. 하며 약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가 되면 커피가 완성된다.


그리고 갓 내린 커피의 맛이란. 말해 뭐해. 그냥 행복이다. 따뜻하게 한 모금 즐기면 이제 얼죽아 타임! 얼음을 넘치기 직전까지 담고 물을 조금 담고 커피를 콸콸콸 쏟아 나만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사무실 자리에 앉으면 그보다 좋은 위안이 없다. 이렇게 지금의 학교에서 2년 넘게 핸드드립을 즐기다 보니.. 문득 욕심이 생겼다.


집에서도 핸드드립 커피 마시고 싶다!

그래서 핸드드립에 필요한 물품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런데 만만치 않았다. 일단 원두가 있어야 하고 여과지가 있어야 하고 드리퍼와 그라인더, 커피 서버, 드립용 주전자까지. 사실 사고자 하면 못살건 없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일 필요가 있나...? 급 주춤했다. 막상 사면 학교에서만큼 사용할 것 같지도 않을 것 같아서 일단 보류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지인이 갑자기 드리퍼를 주었다. 진짜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오호. 이건 집에서도 커피를 내리라는 신의 계시다.


그래서 기세를 몰아 원두와 여과지를 구매했다. 그리고 그라인더를 검색하는데 종류와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다. 뜻하지 않은 벽에 부딪힌 기분. 한 30분을 그렇게 그라인더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다 안 되겠다 싶어 쇼핑몰 창을 꺼버렸다. 아... 이게 이렇게 고민할 일인가. 그냥 학교에서나 마시면 되지. 사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잖아. 왜 갑자기 욕심은 생겨가지고.


다 때려치워! 하고 벌러덩 드러누웠는데 갑자기 거실 윗 수납장이 눈에 띄며 번뜩 생각난 것이 있었다.


바로 믹. 서. 기.


그것도 무려 첫째 아이 키울 때 이유식용으로 쓰던 믹서기. 그라인더나 믹서기나 어차피 용도는 똑같은데 원두라고 믹서기로 갈면 안 될까? 싶어서 검색을 해보았다.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많은 이들의 찐 리얼 후기가 주르륵 나왔고, 열몇 개 정도의 블로그를 들어가 본 결과 원두용 그라인더로 갈아 마시는 것보다는 당연히 퀄리티가 낮지만 그래도 집에서 마실만은 하다.라는 후기가 대부분이었다. 나 역시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야매(?)로 학교에서 내려마신 경력만 2년이니, 저 정도 후기면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 기다렸다. 원두와 여과지가 오기만을.


3일 정도가 지난 후 드디어 도착한 원두와 여과지! 하지만 바로 해볼 수는 없었다. 커피를 내리려면 믹서기와 뜨거운 물이 있어야 하는데 둘 다 우리 집 미취학 아동들에게는 너무 위험한 물건이기에 아이들이 없을 때나, 혹은 어딘가에 정신이 쏙 빠져있을 때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머지않아 주어졌다. 집에서 실시간 화상 강의가 있던 날 오전 세 시간의 강의를 끝내고 널브러져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지금이다! 지금이야! 지금이 아니면 할 수가 없어!


벌떡 일어났다. 5년 만에 꺼낸 믹서기는 다행히 유리여서 멀쩡했고, 날도 아주 잘 살아있었다. 처음 시어머님이 이유식 하라고 이 믹서기를 사주었을 때는 쓸 때마다 어마 무시한 무게에 손목이 아파 원망을 원망을 해댔는데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인생사 한 치 앞도 모른다는 게 정말 뼈 때리는 진리이다.


믹서기 꺼냈고 원두 꺼냈고, 물도 끓였고. 드리퍼에 여과지도 끼웠고. 자 이제 갈아볼까!? 두근. 두근. 두근. 이게 뭐라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믹서기의 날은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위잉~! 오! 잘 갈리는데!? 하긴 애기 유아식 만들 때도 사정없이 오이고 양배 추고 다 갈아버렸던 녀석이니 원두라고 다를 게 있겠어? 향도 기가 막히고 그라이더 안 사기를 아주 잘했다!


육안으로는 아주 균일하게 갈린듯한 커피를 드리퍼에 넣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나는.. 드립용 주전자가 없던 것이다! 두둥.....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뭉툭하고도 무거운 커피포트뿐.. 오. 마. 이. 갓.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믹서기도 해냈는데 커피포트라고 못해낼 것이 무엇이 있겠느뇨!? 커피포트로 내려보자. 물까지 담겨있어 어마 무게 한 무게의 커피포트 때문에 저절로 떨리는 팔을 겨우 부여잡고 원 그리기 도전! 오 괜찮은데!? 무게 때문에 자꾸 원이 찌그러지긴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또르르 또르르..


커피 내려지는 소리가 정말 듣기 좋았다. 아마 믹서기와 커피 포트라는 아주 열악한 상황에서 얻은 결과물이기에 더 그렇지 않았을까.

나의 홈메이드 핸드드립 커피 3 총사. 커피포트. 유리 믹서기. 드리퍼. 그리고 벌써 몇 년째 쓰고 있는 보냉컵. 커피포트로 조심조심 내리고 있는데 커피 향 좋다면서 다가온 남편이 한마디 했다.


"내가 사줄게. 주전자랑 그라인더 사라. 이게 뭐냐. 어차피 마실 거면."

"괜찮아~~~~ 충분히 맛있다~~~"


궁상은 맞을 거다. 분위기도 한몫하는 커피를 내리면서 유리 믹서기가 웬 말이며 커피포트는 봉창을 두드리고도 한참 남을만한 조합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만족한다. 사실 드립백을 사서 하루하루 내려먹는 게 가장 신선하겠지만 이렇게 한번 내려 텀블러 하나 가득 보관해놓으면, 마치 엄마들이 밥 한솥 가득해서 비닐에 봉지봉지 넣어 냉동해놓고 든든해하는 마음과 같이 세상 든든하니까. 그리고 맛도 꽤 괜찮다.


그리고 더불어 재활용이라는 게 따로 있겠나. 이게 바로 믹서기의 생각지도 못한 재활용이지. 1년간 바짝 일하고 5년을 수납장에 있는 듯 없는 듯 지냈던 믹서기가 이렇게 빛을 발할지 누가 알았나. 이렇게라도 쓰지 않았다면 아마 이사 갈 때쯤 저 믹서기는 버려졌을 것이다. 요리에 취미가 없을뿐더러 어쩌다 요리를 해도 아이들이 크면서 믹서기를 쓸 일은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드립용 주전자는 좀 사볼까.. 고민 중이다. 가뜩이나 안 좋은 팔목이 커피포트 때문에 더 안 좋아지면 안 되니까. 지금도 저 때 내린 커피를 꺼내 얼음 가득한 500ml 보냉컵에 부어 홀짝홀짝 마시고 있다.


조금 투박하고 궁상맞아도 결국 행복은 내가 찾아내는 것이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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