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여서 괴로운 너와 나
큰소리가 들렸다. 건물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 분이 가득 서려있었다. 무어라무어라 한참을 말했지만 목소리만 들려올 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듣고 싶지도 않았다. 또 한차례 폭풍이 불어닥치는가, 하는 걱정이 짜증이 되어 이미 가슴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으로 가로막힌 저 편에서 들려오는 고함 비슷한 소리가 사라지고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내 옆이었다. 친절하게 그 남자에게 어떤 일이 생겼고 그 사달을 만든 사람은 또 다른 어떤 사람이며, 그래서 차후 그 남자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거라고 얘기했다며 한참을 떠들었다.
쉽사리 닫힐 줄 몰랐던 그 입은 혼자 한참을 떠들다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 사달을 만든 사람이 처한 상황에 관한 설명이었다. 안쓰럽다고 했다. 내가 듣기에도 안쓰러웠다. 하지만 안쓰럽다는 감정이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발장이 용서받지 못했듯이, 그 사람도 용서받기는 힘들 거라는 게 우리의 결론이었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그 정답이 우리 사이에 쏟아지는 말들 사이에서 길을 잃고 빙빙 돌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된 남자를 보았다. 말간 얼굴, 천진난만하다 못해 가여워 보이는 그 모습을 보고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이 처음부터 끝까지 잘못된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는 밥을 먹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고,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어먹었다. 한없이 평온해 보였다. 야무지게 젓가락으로 된장국에 동동 떠있는 두부까지 건져먹는 모습을 보고 하마터면 웃어버릴 뻔했다.
또 한동안의 시간이 흐르고 화가 많이 녹은듯한 그 남자가 들어왔다. 같은 공간, 같이 있지 말아야 할 두 존재가 얼마 되지 않는 공간을 사이에 두고 함께 있는 모습은 어딘가 많이 부적절해 보였다. 공간이 주는 잔혹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 중 한 명은 가해자이고, 한 명은 피해자일까. 아니면 그들은 서로에게 가해자이자 피해자일까. 꽤나 오랜 시간 다른 정의로 이름 붙여진 그들이 이제는 한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부적절해졌지만, 그 둘 중 어느 한 명을 위한 다른 공간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한 공간에서 숨 쉬고 움직이고 말을 한다. 눈은 마주치지 않으면서, 동선은 최대한 피하면서,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테두리 안에 갇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보며 오랜 시간을 보낸다.
관계라는 것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이루어지면 공유하던 공간이 사라지는 순간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멀어진다 하더라도 인생의 한 면을 함께했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적당히 불편하고도 어색한 관계로 남으면 그래도 성공이다. 그들은 어떨까. 누구도 인생에서 피해 갈 수 없는 한 시절을 함께 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걷어낼 만큼 같은 공간을 소유해야만 하는 이 남은 시간들이 그들을 지긋지긋한 관계로 남게 할 것이다.
이 이야기는 결국 내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을 매일 마주해야 하는 현실, 그래도 한 때는 이해로 넘길 수 있던 모든 것이 하나하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상황, 이 모든 것이 공간을 같이 공유하기에 오는 괴로움이라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것이 있기는 할까.
여러 명이 함께 쓰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만큼 내 마음도 더 이상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에는 이제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있어야만 하는 이 공간이 미치도록 싫다. 도망갈 문은커녕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명분이 켜켜이 쌓인 공간의 한구석, 내 자리가 너무도 싫다. 환장할 노릇은 내 자리는 싫지만 내 소속은 싫지 않다는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간다. 그 남자와 말간 남자는 어떤 선택을 할까.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다 부질없는 질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가 다 같이 그 공간에 있는 한, 그저 우리는 때때로 숨이 막히고, 마음이 막혀 죽을 것만 같을 때 가끔 뛰쳐나와 다시 숨을 쉬고 다시 들어가 그저 그렇게 시간을 보낼 뿐이다.
그래 그럴 뿐이다. 우울해하며. 슬퍼하며. 분노하며. 좌절하며. 공간의 잔혹함을 견뎌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