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올해는 내 나름 도전을 많이 했던 해였다. 아직 한 해를 정리하기에는 두 달이라는 시간이 남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날들보다 벌써 지나가버린 시간이 훨씬 많기에 나는 요새 종종 미련스럽게 뒤를 돌아본다.
올해 도전한 것들 중에 가장 뿌듯했던 건 아무래도 사내강사 데뷔일 것이다. 집합교육시간을 채우고자 들었던 전문강사 양성과정이 계기가 되어 4월에 한번, 9월에 한번 그리고 11월에 한번 총 세 번의 강의를 했다. 똑같은 주제였지만 두 번은 비대면 실시간 화상강의였고 가장 최근에 한 강의는 대면 강의였다.
대면 강의 의뢰를 받자마자 머릿속에 든 생각은, 강의안을 싹 뒤집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두 번의 비대면 강의에서 쓴 내용과 크게 다르진 않지만 순서를 재편성하고 글자를 키워드 중심으로 바꾸니 훨씬 보기가 좋았다. 그렇게 며칠에 걸쳐 짬짬이 강의교안을 완성시키고 전송하니 하루하루가 피 말렸다.
누구 앞에 서서 말한 것이 도대체 언제 적이던가. 그것도 연속 세 시간을 나 혼자 말해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아침에 늦지 않게 강의장에 갈 수 있을까. 걱정을 사서 하다 보니 드디어 강의 날이 다가왔다. 강의 시작 15분 전에 와달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여유롭게 집에서 출발했다. 초행길이 아니었기에 마음 편하게 운전하고 있는데, 잉? 네비가 내가 알고 있는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잠시 갈등했지만 네비는 항상 최적의 길을 알려주었기에 네비를 믿고 방향을 틀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가 문제였다. 회전 구간에서 타이밍을 놓친 나는 무려 10km를 빙빙 돌아 강의 7분 전에 기적적으로(?) 도착하게 된다.
진짜 겨우 숨만 고르고 강의 시작!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내가 빙빙 돈 이야기를 꺼냈으나 다들 멀뚱멀뚱 눈만 뜨고 계셔서.. 급하게 마무리하고 수업 시작. 정말 정적 속에 유일하게 흐르는 내 목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질문을 던졌다. 역시나 정적. 1초. 2초. 망했다 싶어 어색한 웃음을 지었는데 그 순간!
내 목소리가 아닌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반응을 한 것이다! 고등학교에 근무하신다는 남자 주무관님.
오 할렐루야!
한번 물꼬가 트이신 그분은 계속해서 대답을 아주 잘해주셨고 나는 그분의 지지(?)에 힘입어 강의를 열정적으로 이끌어갔다. 그리고 내가 강의를 즐기게 되자 다른 분들도 슬슬 반응이 왔다. 됐다! 이때부터 강의는 성공이었다.
휘어잡은 분위기를 놓치지 않기 위해 둘째 시간에는 우리 달달한나언니가 주신 아이스브레이킹 자료도 적절하게 잘 사용하고, 빼빼로데이가 다가와서 준비한 빼빼로도 적절하게 나눠주며 2교시가 클라이맥스에 오를 즘!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강사님!
날 부른 건 괜찮았다. 그런데 말투가 영 심상치 않았다. 불만 가득한 목소리. 바짝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티 내지 않았다. 난 강사니까. 내가 저분보다 어려도 일단 나는 이 수업의 주인이니까.(갑분 주인의식ㅋㅋㅋ)
나 - 네!?
수강생 - 이거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보통 학교에서는 이렇게 하는데?
말투가 너무 공격적이어서 처음엔 잘 알아듣지도 못했다. 그때, 맨 앞줄에서 너무도 모범적인 자세로 내 강의를 듣던 주무관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쟤는 왜 저러는 거니?"라는 표정으로 나랑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을 보며 "아! 내 편이 있구나"하는 생각에 또 급 자신감이 충전되었다.
나 - 주무관님~다시 한번 말씀해주시겠어요?
수강생 - 아니 지금 그렇게 설명하셨는데 학교에서는 안 그래요 꼭 그렇게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 - 아, 그렇죠. 학교에서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이 자리에 있고, 원칙을 우선적으로 알려드려야 하니까 설명을 이렇게 해드린 거예요. 물론 모든 게 원칙적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니까요.
수강생 - (정색과 침묵)
갑자기 분위기가 쎄헤짐을 느꼈다. 그래서 내가 말을 덧붙였다.
"혹시 또 궁금하거나 그런 거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셔도 됩니다~~"
그렇게 강의를 이어갔다. 두 번째 시간도 끝! 마지막 시간은 원래 좀 짧고 굵게 가려고 마음먹었기에 시작부터 다시 빼빼로 통을 열었다. 이미 두 번째 시간부터 반응이 폭발적이었던 달달한나님의 아이스브레이킹 자료는 3교시에 아주 정점을 찍었다! 너도나도 맞추겠다고 화면을 뚫어지게 보는 모습에 덩달아 나도 신이 났다. 그리고 더 재미있었던 건 날 공격(?)했던 수강생 분도 뒷자리에서 고개를 미어캣처럼 내밀고 맞추려고 애를 쓰고 계셨다는 것이다.
재밌는 아이스브레이킹 시간이 끝나고 3교시 수업도 끝나고, 마지막으로 정리까지 끝내고 나니 여기저기서 질문들이 몰려들었다. 내가 대면 강의를 준비하며 가장 피하고 싶었던 장면이 딱 2개 있는데, 첫 번째가 내가 아는 사람이 듣는 상황과 두 번째는 질문을 받게 되는 것.
다행히 신입 공무원들이 주로 신청을 해서 내가 아는 사람은 없었으나 신입 공무원들이라 질문이 너무 많았다. 대부분 대답해줄 수 있는 것들이었지만 일부는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유연히 잘 넘어갔다. 같이 연수원에서 밥을 먹자는 담당자의 제안에 완곡히 거절을 하고 차에 앉는 순간 정말 온몸에 힘이 풀렸다.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지만 단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세 시간 동안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을 엄청 주고 있었는지 여기저기가 쑤시기도 했다. 그래도 뿌듯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전문강사 양성과정을 들었던 그 강의실에서 수강생이 아닌 강사로서 강의를 해냈다는 사실이 너무도 기뻤다.
강의 전날 너무 긴장돼서 새벽까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리고 내가 강의를 하게 될 강의장이 연수원 몇 호인지는 알았지만 그곳이 내가 강의를 들었던 곳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검색을 하다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강사님의 블로그를 발견했다.
옷! 그리고 블로그에는 우리에게 강의를 하셨을 때의 소감과 사진이 간략하게 남겨져있었다. 오.. 그리고 거기서 알게 되었다. 내가 강의할 장소가 내가 강의를 들었던 곳이라는 걸. 반갑고 긴장되는 마음에 댓글을 남겼다. 저는 누구누구이고 강사님과 함께했던 그 장소에서 제가 첫 대면 강의를 하게 되었다고.
그에 대한 답장은 내가 길을 잘못 들어 한참 헤매고 있을 때 왔다. 수강생들과 "라포 형성"을 잘하면 강의는 저절로 될 거라고. 심호흡하고 들어가라고. 3일 연속 강사 양성과정을 듣는 내내 라포 형성에 대해 엄청 강조하셨기에 개념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알지 못했다. 진짜 라포 형성이라는 게 무엇인지. 하지만 직접 부딪혀보니 이제는 알겠다. 라포 형성이란 수강생이 강사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이다. 꾹 닫은 입과 감시하는 듯한 눈을 거두고 부드러운 눈빛과 열린 마음으로 이 강의를, 이 강사를 받아들여주겠다고 수강생들이 마음먹는 순간. 그 순간 라포가 형성되는 것이다.
겨우 한 번 대면 강의해놓고 너무 거창하게 뭘 아는 듯이 말하는 것 같지만, 이것이 내가 이번 대면 강의를 통해 배운 가장 큰 것이다. 결국 사람이 하고 사람이 듣는 것이기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감에 대한 인정. 그동안은 강의 의뢰가 들어오면 난감해하며 수락을 했는데 이제는 내가 기분 좋은 "을"이 되었다. 정문까지 배웅을 하시는 연수담당자님께 앞으로 나 좀 많이 불러달라고 말을 한 것이다.ㅋㅋㅋㅋ막상 또 강의 의뢰가 들어오면 머리털 잡고 힘들게 고민할 거면서.
꿈이 생겼다. 회계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도 좋지만 나중에 경력이 더 쌓이면 신규공무원들에게, 혹은 3-5년 차의 과도기 공무원 후배들에게 현실적이고도 가슴 따뜻한 조언이 담긴 강의를 하고 싶다는 꿈.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이 자리에서 몇 년은 더 버텨야겠지만 이 나이에 꿈이 생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면 강의를 하길 잘했다는 뿌듯함이 든다.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