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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Apr 22. 2019

7. 바람 빠진 코끼리

잠깐 이 울타리에서 쉬어가는 것뿐이라고


바람 빠진 코끼리


남인도 함피. 뜨거운 뙤약볕을 뚫고 비루팍샤 사원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에이씨, 더워! 괜히 나왔어!’

이미 등이며 발이며 땀으로 범벅돼 온몸이 미끈거렸다. 찝찝하고도 불쾌한 기분으로 사원 안쪽 그늘을 찾아 걸어 들어가는데 옆에 있던 동생이 갑자기 ‘저기 봐요. 언니!!!’ 한다. 무심코 가리키는 쪽으로 고갤 돌렸더니 저 멀리에 웬 시커먼 덩치 하나가.


“헐? 저거 지금 코끼리인 거야?”



세상에. 진짜 코끼리다.

동물원에서도 잘 못 본다는 그 귀하신 몸.

내 코끼리를 이렇게 가까이서 볼 줄이야.


근데 저 덩치 큰 녀석이 저리 온순하게 가만히 붙잡혀 있는 게 좀 이상했다. 묵직한 코로 마음먹고 후려치면 사람 대여섯쯤은 우습게 날려버릴 것 같은데도 그저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마냥 고분고분.


아냐.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어.

저건 내가 알던 그 코끼리가 아니야.

저게 코끼리일 리가 없어. 절대.


*


누구나 죽고 못 사는 친구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차마 목숨이랑 바꾸겠다고 까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 비슷한 거까지는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내 반쪽 같은 친구. 나 역시 마음을 나눈 지 좀 오래된, 인생의 반을 함께한 소중한 친구가 하나 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종합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갔던 겨울, 나는 학원 휴게실에 앉아 있던 그녀와 처음으로 만났다. 새까만 똑 단발이 굉장히 인상 깊었던 그녀는 생전 처음 보는 내게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손을 척 내밀었다.


“안녕? 난 이현아. 얼핏 들었는데 너 나랑 같은 중학교더라? 친하게 지내자.”


특유의 당당함에 채 놀랄 틈도 없이 나는 그녀의 오른손을 맞잡고 흔들었고 그렇게 우린 얼떨결에 친구가 됐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녀와 이렇게까지 오래 친구로 지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기엔 우리는 취미나 성격, 혹은 좋아하는 음악이나 집안 환경과 같은 모든 게 너무나 달랐으니까. 당시만 해도 엄마와 그다지 살가운 편은 아니었던 나와 달리 그녀는 어릴 적부터 부모님과 참 많은 대화를 하는 다정한 딸이었고, 늘 어정쩡한 성적으로 보통만을 유지했던 나와 다르게 현아는 이미 한 학기나 진도를 앞서나갈 만큼 똑똑한 우등생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맞는 게 하나도 없던 우리가 어떻게 친구가 될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지만, 어쨌거나 그녀와 나는 첫 교복을 입던 그 날부터 학사모를 벗고 정장을 입는 순간까지 모든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나는 현아가 가진 것 중 대부분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부러웠던 건 무슨 일이 있어도 ‘까짓것, 하면 되지 뭐!’라고 밀어붙여 버리는 그녀만의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모의고사를 망쳐도 용돈이 떨어져도 순식간에 그 어둠을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그녀만의 밝은 빛. 살면서 어쩌다가 길바닥에 엎어져도 ‘에이씨, 기왕 넘어진 거 잠깐 쉬었다 가지 뭐’라며 그러려니 넘길 수 있는 그녀만의 여유를 나는 참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난 현아가 국가 고시를 준비하기 위해 수험생 신분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흔쾌히 너는 할 수 있을 거라 자신 있게 말했다. 진짜 현아는 충분히 합격하고도 남을 인간이니까. 혹 합격하지 못한다 해도 결코 좌절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서 그저 옆에서 묵묵히 응원해 주겠다고. 그러니 불안해하지 말고 평소 하던 대로만 하라며 함께 파이팅을 외쳐 줬다.


근데 아무리 당찬 사람이라도 가끔은 에너지가 방전될 때가 있긴 한가 보더라. 시험에 떨어진 후 그녀 특유의 밝은 에너지가 갈수록 사라져 가는 게 보였다. 몇 달 만에 그녀를 마주했을 때 나는 내 앞에 있는 이 여자가 그간 내가 알던 그 이현아가 맞나 의심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친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던 그녀가, 벼락치기를 해도 늘 우등생이었던 내 친구가. 왜 이렇게 바람 빠진 풍선같이 늘어져 있는 걸까.


속상하고 또 겁이 났다. 내가 어릴 적부터 알던 그 모습이 사라진 것 같아서.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그 아우라가 두 번 다시 빛나지 않게 될까 봐.



“쟤 저거 충분히 끊고 나올 수 있을 거 같지 않아?”


코끼리의 앞다리에 묶여 있는 쇠사슬이 괜히 미웠다. 저게 뭐라고. 한 번만 독하게 마음먹고 걷어차면 볼품없이 쨍하고 떨어져 나갈 쇠 쪼가리일 뿐인데. 인간 따윈 감히 덤빌 엄두도 못 낼 만큼 거대한 힘을 가진 저 짐승이, 왜 벌써부터 푸시식 바람이 빠져 울타리에 털썩 널려 있는 걸까. 보는 사람 마음 아프게.


나는 함피에 있는 내내 시도 때도 없이 이 코끼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한국에 두고 온 내 친구 현아를 생각했다. 쓴 한약을 삼킨 듯한 표정으로 내 앞에 풀죽어 있던 그 얼굴. 실패의 고통을 견디느라 내쉬는 숨에서조차 독한 내음이 풍기는 것 같던 그 안타까운 모습이, 이 코끼리와 너무나 닮아 보여서. 


허나 제아무리 지쳐 있다 한들, 한번 코끼리는 영원한 코끼리다. 다리가 묶여 있고 무서운 채찍이 등을 내리친다고 해도, 한번 코끼리로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다시 코끼리로서의 삶을 살아가겠지.


지금 당장은 쇠사슬에 발목이 묶여 한낱 관광객이 나눠 주는 바나나나 받아먹고 있지만, 어느 날 갑자기 불끈 용기가 생길 때면 내가 언제 갇혔었냐는 듯, 묶여 있던 쇠사슬을 보기 좋게 걷어차 버리곤 밀림으로 힘차게 달려가는 그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테니까.


그러니 현아도, 저 코끼리도 그냥 잠깐 이 울타리에서 쉬어가는 것뿐이라고, 비록 잠시 늘어져 있긴 했지만, 언젠가 이 족쇄를 풀고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고야 말 거라고. 그렇게 한번 믿어 보려 한다.


힘내 인마. 넌 그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밀림의 거물! 무려 코끼리란 말이다. 지금 너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해? 못 본 지 오래됐다고 지지배배 보채는 애들도 한둘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얼른 정신 차리고 꼭 다시 돌아와야 한다.


보고 싶어 죽겠다. 이 녀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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