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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Apr 29. 2019

8. 사과를 주워 담듯이

이것 역시, 내가 지금 인도에 있기 때문일 테니


사과를 주워 담듯이



벵갈루루에 도착했던 날, 기차역 밖으로 한 발 짝 떼자마자 느낌이 확 왔다.


“오 젠장, 여기 너무 별론데??”


이름만 딱 들었을 땐 좀 뭐랄까, 신비롭고 수풀이 우거진 밀림 같은 그런 지역이라 생각했건만. 막상 도착해서 뚜껑을 열어 봤더니 이거 뭐 뉴델리 뺨치게 대도시인 거다. 온 도로는 차들이 점령했고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속에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게 다 허겁지겁 빨리빨리. 


사람이 미친 듯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숙소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좀 괜찮다 싶은 숙소는 비즈니스맨들 때문에 이미 Full. 그나마 빈방이 있다는 곳에 기어들어가 가격을 물어보니 무려 1,300루피란다. 헉 소리 나는 방세에 우물쭈물하고 있었더니 심드렁한 표정이 칼같이 따라붙는다.

“여기서 안 묵을 거면 현관문 막고 있지 말고 좀 비켜 줄래??”


결국엔 반쯤 오기로 하루 치 숙박비를 계산한 뒤 방으로 올라오면서 굳게 다짐했다.

‘내일 당장 이 거지 같은 벵갈루루를 떠날 테야. 여긴 진짜 제대로 꽝이라고!!’




어릴 적에 경북 구미에서 몇 년 살았던 적이 있었다. 아빠가 구미로 발령을 받으면서 우리 가족은 살던 대구 집을 정리하고 구미로 이사를 하였고 그렇게 나는 구미에서 2년이란 시간을 보냈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도심에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깡촌에 있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으려면 차를 차고 저 멀리 시내로 나가야 할 정도로 주변 상황이 열악했다. 환경이 이렇다 보니 놀이터라든지 오락실 같은 건 꿈도 꿔 볼 수 없었는데 그래도 딱히 심심하다거나 무료하지는 않았다. 왜냐면 나와 온종일 잠자리 잡기, 달팽이 찾기, 땅따먹기 등을 하며 놀아줄 외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즐거웠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했던 놀이는 바로 과수원에 떨어진 사과를 주우러 다니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집 옆에는 ‘사과 줍기 놀이’를 할 수 있는 과수원이 하나 있었는데, 딱 5,000원만 내면 온 가족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사과를 포대에 마음껏 주워 담을 수 있는 거였다. 놀이의 규칙은 단 하나, 절대로 나무에 달린 것은 따지 말 것! 이 규칙만 잘 지키면 나는 할머니와 함께 과수원에서 아주 재미난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다.


놀이가 시작되면 나와 할머니는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사과 줍기에 돌입했다. 최대한 크고, 싱싱한 사과를 주워 담기 위해서. 이 사과를 줍는 데는 생각보다 운이 많이 따라야 했다. 재수가 좋을 때는 방금 나무에서 땄다고 해도 믿을 만큼 싱싱한 사과를 얻을 때도 있지만, 조금만 운이 나쁘면 송충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 썩어가는 놈을 집어 들 때도 있었으니까. 특히나 사과밭에 사는 송충이들은 하나같이 왜 이리도 새빨간 건지, 무심코 집어 들었다가 우글우글거리는 빨간 벌레를 마주하곤 ‘으아아아악!!!’ 소리를 지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이 사과 줍기 놀이는 어떤 날엔 질 좋은 싱싱한 놈을 건지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징그러운 벌레들을 끊임없이 마주하기도 하며 그렇게 ‘복’과 ‘불복’을 반복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벵갈루루의 거리에 서 있자니 예전에 할머니와 함께했던 과수원 놀이가 떠오른다. 마치 한편의 복불복 게임을 하듯 사과를 주워들었던 그때와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인도 곳곳을 떠돌고 있는 지금이 별반 다를 게 없는 거 같아서. 재수 좋은 날엔 과즙이 쭉쭉 나오는 아삭아삭한 도시를 만나기도 하지만 운이 따르지 않을 땐 음식도 분위기도 영~ 아닌 이런 곳에 뚝 떨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알고 보니 여행도, 사과를 줍는 것도, 사실 뭐 크게 다르진 않은 거더라고.

아, 진짜 기대 많이 했는데.


놀 거리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은 그런 재미난 곳일 거라 생각했건만 이게 뭐냐고.

거리엔 온통 차들뿐이고 잘 곳도 마땅치 않은 데다,

사람들은 아주 찬 바람이 쌩쌩 날릴 정도로 불친절하잖아.

벵갈루루!! 너 완전히 썩은 사과 같아. 제대로 ‘꽝’이라고!!





근데, 시간이 흐르고 나니 어릴 적에 내가 집어 올렸던 사과가 싱싱한 것이었든 벌레 먹은 썩은 사과였든 그건 크게 중요치가 않더라. 결국 기억에 남는 건 ‘사과 줍기’ 그 자체다. 싱싱한 사과는 싱싱한 사과인 채로 신이 났고, 썩은 사과는 또 그냥 그거대로 즐거운 추억이 됐듯이 아마 지금의 벵갈루루에 대한 기억 역시 그러하지 않을까?


예전에 뭘 주웠든, 얼마나 실패했든 지금 그건 크게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냥 내가 과수원에서 사과를 주워 보았다는 것. 배낭을 메고 이 인도를 거닐어 보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거다. 재수 없게도 인도의 수많은 지역 중 굳이 마음에 안 드는 곳을 골라 조금 짜증 나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결국 이것도 다 내가 지금 인도에 있기 때문에 겪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겠나. 그러니 성질 내는 건 이제 그쯤 해 두고 슬슬 이 ‘인도에 있음’ 자체를 즐겨 보자. 똥 밟았다고 너무 그렇게 인상만 쓰고 있기엔 이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너무 아깝잖아?


아마 내 생각엔 벵갈루루의 이 이미지 역시 금세 사라지지 않을까 싶다. 송충이 때문에 그리 혼비백산 넋이 나가 봤으면서도 “사과 주우러 다니던 그때 시절이 참 그리워”라 말하고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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