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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Apr 20. 2019

6. 아무것도 하지 말자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아무것도 하지 말자


인도로 떠나오기 전에 굳게 다짐했던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매일매일 원 없이 쉬어 보자는 것. 그동안 얼마나 바빴나. 각종 보고서에 외근에, 밥 한 끼 챙겨 먹을 새 없이 바쁜 일상을 헐떡헐떡 따라가느라 심신이 너덜너덜했지 않나. 그래서 인도에 도착하면 코가 비틀어질 때까지 놀아 주리라. 온종일 자고, 매일 맛있는 음식을 원 없이 먹으면서 신 나게 즐겨야지. 그리 생각을 했었더랬다.


근데 이상하게 막상 여행을 시작하고 나니까 그게 마음먹은 대로 잘 안 되더라. 곳곳이 볼거리 천지고 신기한 것들 천국인 이곳에서 어떻게 편히 ‘쉬기만’ 할 수 있겠는가. 왠지 관광 명소 같은 곳은 한 번쯤 눈도장을 찍어 줘야만 할 것 같고, 포토 스팟에서 남들 다 찍는다는 인생샷도 한 장씩 남겨 줘야 뭔가 ‘여행의 멋’이 나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래서 나는 애초에 인도로 떠나왔던 목적과는 정반대로, 남들이 간다는 데는 무조건 다 찾아가 보고, 유명하다는 식당은 일일이 다 검색해서 직접 시식해 봐야 성이 풀리는 아주 빡센 일정을 매일매일 감행하기 시작했다.

근데, 이게 어느 순간이 되니까 조금씩 지치더라. 처음에야 다시 밟은 인도 땅에 그저 신이 나서 여기저기 칠렐레 팔렐레 뛰어다니고 사진도 찍고 그랬다지만, 이게 또 한 보름이 넘어가니까 슬슬 몸이 못 따라가기 시작하는 거다. 심지어 유적지 투어를 하도 많이 다닌 바람에 이젠 아무리 거대하고 웅장한 사원을 봐도 다 그게 그거 같고 딱히 대단한 줄도 모르겠을 지경.


와 원래 여행이 이렇게 재미없는 거였나?

내가 알던 인도 맞아? 왜 이렇게 하루하루 지치는 거냐고!



그렇게 기분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 가던 어느 날,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우연히 한국인 동생 두 명을 만났다. 같은 대학교 선후배 사이라던 희경이와 언지. 우리 셋은 처음부터 쿵짝이 잘 맞아 만난 첫날부터 새벽 두 시까지 끊임없이 먹고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그렇게 별똥별이 뚝뚝 떨어질 때까지 놀던 날 밤, 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언지 : “희경아. 우리 내일 뭐 할래?”

희경 : “내일? 글쎄, 근처에 사원이나 구경하러 갈까요?”

언지 : “사원? 나 거기 별로 안 땡기는데.”

희경 : “그래요?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요~!!”

언지 : “오케이! 아무것도 하지 말자. 굿 아이디어!”


응? 아무것도 하지 말자니? 뭘?

설마 먹지도, 놀지도, 보러 나가지도 말자는 말이야?


다음 날, 두 사람은 저녁 해가 떨어질 때까지 진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주변에 볼거리와 먹거리가 널리고 널린 함피에서, 아무것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안 먹으며 그렇게 저녁까지 방 안에서 뒹굴다가 해가 떨어지고 나서야 ‘아, 배고프네?’ 하면서 숙소 밖으로 기어 나온 거다.


와, 저게 가능해? 어떻게 온종일 방 안에서 안 나올 수가 있지?

어떻게 여행을 와서 저렇게 아무것도 안 할 수가 있느냔 말이야.



허나 두 사람과 헤어진 이후, 나는 몸과 마음이 늘어질 때마다 그 날의 대화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볼거리들에 흥미를 잃을 때마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게 지겹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쿨하게 ‘아무것도 하지 말자’던 두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희경이와 언지처럼 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집순이처럼 생활하기에 돌입했다.


열한 시쯤에 느지막이 일어나 바나나로 대충 점심을 때우고, 누워서 일기를 쓰거나 딩가딩가 음악이나 좀 듣다가, 운이 좋아 비라도 오는 날이면 추적추적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낮잠을 청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하루를 아주 제대로 느슨하게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근데 정말 신기하게,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함’으로 채우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여행이 더 더 재미있어지더라. 뭔가를 봐야 하고, 먹어야 하고, 느껴야 한다는 그 압박을 벗어던지고 나니 그제서야 진짜 ‘아, 내가 여행을 시작했구나’ 싶은 기분이 들더라고. 그전까지는 인도를 ‘보러 다니는’ 입장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인도에 있는’ 상황이 되다 보니 전에 없던 여유가 막막 생겨났다.


남들이 유명하다고 하든 말든. 맛집이라고 난리가 나든 말든 그냥 내가 보고 싶으면 보고, 먹기 싫으면 몇 끼씩 굶기도 해 가면서. 그렇게 루즈하고 게으르게 여행을 하다 보니 서서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도가 내 곁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은 여행을 와서까지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을 떨치기가 어려운가 보다. 회사 다닐 때는 그렇게나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으면서, 왜 그렇게 살 필요가 전혀 없는 인도에서까지 ‘맛집 찾기, 관광지 서칭하기’ 등으로 하루하루를 피곤하게 보내고 있었던 건지.


그러지 않아도 되는 거였는데.

그냥 내가 안 보고 싶으면 안 보면 되고.

쉬고 싶으면 온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낮잠이나 퍼 자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이건 그냥 내 ‘여행’일 뿐인데 말이다.


이게 다 우리가 평소에 너무 열심히 살아서 그런 걸 테다. 하도 빡세고 치열하게 살아온 탓에 그렇게 살아야만 열정적으로 사는 걸 거라 믿기 때문에. 왜 이미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렇게 배우지 않는가. 평생을 뼈 빠지게 노력한 개미는 결국 성공하고, 낮잠으로 시간을 탕진하던 베짱이는 늘그막에 쫄딱 망해서 초라하게 얼어 죽고 만다고. 그래서 나는 이 동화처럼 매사에 정말 열심히만 살았던 것 같다. 베짱이처럼 망하지 않으려고. 좀 멋지고 번듯하게 한번 살아 보려고. 사실 알고 보면 꼭 정답이 하나인 것만은 아닌데 말이지.


이게 바로 ‘습관’인가 보다. 단 몇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조차 초조해 하고 불안에 떠는 것. 뭔가 보거나, 먹거나,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죽을 사람처럼 안절부절 조바심을 내는 성마른 행동들. 결국 그 습관들이 하나하나 모여, 지금 인도에서까지 내 정신을 숨 가쁘게 만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희경이와 언지를 만나고 난 뒤, 나는 그제야 ‘서현지다운 여행’을 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한다면 그저 나도 해야만 했던 그 생활을 싹 다 청산하고. 그냥 하루하루 내 기분이 시키는 대로, 어떤 날은 방구석에 처박혀 있기도 했다가, 또 어떤 날은 미친 듯이 돌아다니기도 하는, 그런 계획 없고 느릿느릿한 여행.


조금은 내려놓아도 좋을 것 같다. 

많이 보고, 좋은 걸 먹고, 남들보다 뭔가를 더 깨닫는 것도 물론 중요는 하겠지만, 꼭 그렇게 뭔가를 ‘많이’ 한다고 해서 더 옳은 여행이고, 좀 더 ‘잘하는’ 여행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여행지에 있는 당신. 지금 당신이 몸담고 있는 그 하루를 아주 아주 마음껏 사용하라. 괜히 남들이 한다고 눈치 보면서 억지로 따라가 스트레스만 쌓고 오지 말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자고, 쉬고, 놀면서. 그렇게 그대만의 방식대로 이 하루를 야무지게 탕진하고 돌아오기를, 그렇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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