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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현지 May 26. 2019

13. 부러워 죽겠습니다

남편감을 고를 땐 딱 저 할아버지 같은 사람을 선택하자


부러워 죽겠습니다



“저기, 여기 좀 앉아도 되겠소?”


기차에 올라타 한창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떤 할아버지가 말을 걸었다.


“내가 부인이랑 자리가 따로 배정이 되어서 말이야. 여기 좀 같이 앉아 갈까 하는데.”


“아, 네네, 앉으세요.”

“고맙네.”


할아버지는 내가 허락을 하자마자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앉을 자리의 먼지를 털었다. 부인으로 추정되는 할머니는 사리를 곱게 차려입고 마치 여왕이나 되는 양 ‘요기, 그리고 조기도’ 하며 지시를 내렸다. 오, 세상에. 누가 보면 부부가 아니라 마님이랑 몸종인 줄 알 거다.


청소가 끝난 후,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자리에 앉혀놓곤 이번엔 들고 탄 도시락과 과일들을 세팅했다. 조그만 보온병을 꺼내 수프도 조르륵 따랐고, 하나뿐인 일회용 포크도 할머니 앞에 가지런히 놓았다. 이때도 할머니는 그저 남편의 행동을 지켜만 보았다. 남편은 부인이 식사를 하는 중에도 주스를 따라 준다거나, 냅킨으로 입가를 닦아 준다거나 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와, 정말 왕비님이 따로 없다.


사실 처음에는 할머니가 좀 너무 아이 같은 게 아닌가 생각도 했었는데. 그것도 한 몇 시간 보다 보니까 슬슬 부럽더라. 그리고 궁금했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사랑받을 수 있는 걸까. 뭔 수를 쓰면 저렇게 남자를 자기한테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 수 있는 거지? 거 참 신기할 노릇일세.


인도 남자들은 왠지 무뚝뚝하고 여자들에게 냉담할 거란 편견이 있었는데 뭐, 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보다. 이렇게 다정하다 못해 닭살 가득한 부부도 있으니. 



할아버지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할머니와 몇 마디 주고받았다.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많이 사랑하나 봐요. 부러워요~”

“그래 보여요? 호호. 고마워요.”

“저도 그런 남편 만나고 싶어요. 나이 들어서도 예쁘다~예쁘다~ 해 줄 사람.”

“뭐, 나도 저리 오랫동안 저럴 줄은 몰랐지. 처녀 적에야 젊고 예쁘니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쭈그렁 할머니가 됐는데도 여전히 저럴 줄이야. 그래서 가끔은 남사스럽다니까?”


수줍게 웃는 할머니가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평생을 사랑받고 산 사람의 얼굴엔 이런 미소가 그려지는구나.

할머니 짱 부러워요. 굿!



가끔 친구들끼리 서로의 이상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갓 대학생이 된 스무 살 때야 ‘큰 키’, ‘뽀얀 피부’, ‘서글서글한 눈’과 같은, 뭔가 외모와 관련한 것들이 항목에 오르곤 했었는데, 그보다 나이가 더 들고 나니 다들 하나같이 하는 말이 ‘나한테 잘해주는 남자’가 이상형이란다.


사실 이건 나도 마찬가지다. 어릴 적에는 그냥 남들 보기에 자랑스러울 만한, 겉모습이 번드르르한 그런 이와 함께 다니는 게 좋았었는데, 서른 줄에 가까워지니 그냥 외모고 뭐고, 그저 나한테 잘해 주는 사람이 장땡이더라고. 내가 살이 쪄도, 얼굴에 여드름이 나도 그저 예쁘다, 귀엽다 해 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눈길이 가고, 또 마음이 이끌리게 되더라.



대학생 때 발 수술을 한 적이 있다. 오른쪽 발이 걷지도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해져 결국엔 급하게 뼈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아야만 했는데, 덕분에 두 달 동안 꼼짝없이 누워 있느라 살이 10kg 가까이 불어나 버렸다. (깁스를 풀고 체중계에 올라섰을 때 어찌나 충격을 받았던지)


그렇게 나는 퇴원과 동시에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좀 더 확실하게 결심을 굳히기 위해 동기들에게 앞으론 절대 간식이나 야식을 먹지 않겠다고도 선언했다. 근데 내 말을 듣고 있던 한 동기 중 한 명이 그랬다.


“굳이 살 뺄 필요 있나? 지금도 괜찮은 거 같은데?”


빈말인 걸 알지만 그래도 내심 고마웠다. 결코 이대로 괜찮지 않단 건 스스로 제일 잘 알지만, 그래도 이런 못생겨진 내 모습조차 괜찮다고 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이대로도 예쁘다고 해 줘서. 그래서 어딘가 모르게 위안이 되고, 또 가슴이 설레더라고.


나는 지금까지도 그때 그 동기가 한 말을 잊지 못하겠다. 얼굴이 얼마나 망가졌든, 살이 얼마나 쪘든 간에 그저 있는 그대로의 서현지를 ‘괜찮다’ 말해 주던 사람. 턱선이 지방에 파묻혀 얼굴형 자체가 달려졌는데도 ‘살 좀 찌면 어때’ 하며 대수롭잖게 넘겨 주던 그 마음.


참 고맙더라고. 그리고 살아가는 데 정말 큰 힘이 되더라. 존중받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그냥 서현지인 자체만으로 다 괜찮아진 것만 같아서. 그래서 그 후로도 어디서 뭘 하든 자신감이 생기고, 또 당당해지더라고.



간식이 먹고 싶단 할머니의 말에 또다시 부리나케 지갑을 쥐어 든 할아버지. 기차가 잠시 정차한 틈을 타 번개같이 뛰어 나가서 커리 한 접시를 사 오셨다. 부인이 혀라도 데일까 봐 숟가락으로 살살 저어 음식을 식혀 주는 그 모습을 보며 진심으로 할머니가 너무너무 부러웠다.


와, 어쩜 저럴 수가 있나. 어떻게 저 나이가 될 때까지 저렇게 헌신적일 수가 있느냔 말이지. 나도 저런 인생의 반쪽을 만나 코가 비틀어지도록 행복하게 한번 살아 보고 싶다. 앉을 자리를 깨끗하게 쓸어 주지 않아도 좋으니, 조물조물 다리 마사지를 해 주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그저 쪼글쪼글 늙은이가 될 때까지 한결같이 나를 사랑해 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괜찮다고 말해 줄 그런 사람. 그런 이를 만나 평생을 살 수 있다면, 아마 인생의 절반쯤은 성공한 거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깨가 쏟아지다 못해 밖으로 철철 흘러넘치는 두 사람을 보며 생각한다. 그래, 앞으로 남편감을 고를 땐 딱 저 할아버지 같은 사람을 선택하자. 눈빛이 따스한 사람, 머리를 쓸어 넘겨 주는 손길이 부드러운 사람, 나를 향하는 그 모든 것들이 분홍빛으로 빛나고, 그냥 내 존재 자체만으로 즐겁다 말해 주는, 그런 사람으로.


아, 다정한 저 커플을 보고 있자니 괜히 더 외로워지는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버틴다? 이대로 더 가다간 열차가 닭장이 되어 버릴지도 몰라. 괜히 또 부러워지기 전에 일기장 덮고 낮잠이나 자야겠다. 쳇.


(P.S. 할아버지, 이건 좀 다른 말인데, 실은 입고 있는 주황색 조끼가 쪼끔! 작아 보였어요. ㅋㅋ. 미안해요.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두 분 모두 사랑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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