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담불라에는 가이야가 산다
ep.3 안녕 나의 가이야
서남아시아 사람들은 자기보다 얼굴 하얀 외국인을 좋아한다. 그들은 내게 종종 예쁘다고 말했고 귀엽다는 말은 그보다 좀 더 자주 했다. 나는 그들이 해주는 칭찬에 때론 민망해하면서도 가끔 웃었다. 현지인들에게 받는 관심은 항상 푸짐하기 때문에 나는 종종 먹지 않아도 배불렀다. 그러나 여행이 길어지면서 서서히 깨닫는다. 그들은 얼굴 하얀 외국인을 좋아한 게 아니라, 얼굴 하얗고 돈 잘 쓰는 외국인을 좋아했다는걸. 돈을 쓰러 온 사람에게 건네는 칭찬이란 대게 그렇게 싱거웠고, 그래서 나는 여행이 거듭될수록 이국 사람이 건네는 빈말에 웃지 않지 않으려 노력하는 의심 많은 여행자가 되었다.
담불라도 별반 다를 것 같진 않았다. 담불라 일정은 고작 2박 3일이었고 이틀 머무는 여행객은 뜨내기들 중에 뜨내기였기에 오고 갈 칭찬도 뭔가를 의심하고 있을 겨를도 없었다.
우리가 탄 버스가 담불라에 도착하자마자 한 남자가 다가왔다. 남자는 얼굴이 까맣고 몸집이 자그마했다. 그는 말랐지만 보기 좋은 근육을 가졌고, 키에 비해 상체 비율이 좋아 실제 키보다 10센티는 더 커 보였다. 다른 호객꾼들은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보기 드물게 조용한 도착이었다. 남자는 우리 앞에서 서더니 반갑게 말을 걸었다.
"안녕. 혹시 예약한 호텔 있니?"
청년다운 밝은 목소리지만 가볍지는 않았다. 분명히 호텔에서 나온 호객꾼일텐데 어쩐지 이 남자에게는 호객꾼들 특유의 절박함이 없었다. 나는 남자에게 두 사람이 묵을 에어컨 달린 방을 찾는다고 말했다. 온수는 나와도 안 나와도 상관없지만 적어도 화장실은 방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남자가 살짝 눈알을 굴렸다. 비싸게 부를 것 같은 예감에 입을 떼기도 전부터 귀찮아졌다.
"1박에 3,500루피(26,000원) 오래 묵으면 더 깎아주고."
남자의 말에 눈이 반짝 뜨였다. 예상했던 금액보다 훨씬 저렴했다. 콜롬보에서 묵은 호텔이 5만 원 가까이였으니 거의 절반인 셈이다. 이 정도로 싼 방은 대체로 시설이 안 좋겠지만 그래봤자 이틀이다. 하루 삼만 원도 안 되는 가격에 에어컨 바람을 쐴 수 있다니. 게다가 첫판에 바로 적정가를 부르는 호객꾼은 흔치 않다.
"언니. 괜찮은 편이죠?"
해리는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물었다. 나도 그렇다는 티를 내지 않도록 노력하며 그렇다고 답했다. 남자는 웃었다. 알아듣기라도 했다는 표정이다. 남자는 무표정일 때와 웃을 때의 얼굴이 달랐다. 소년과 청년 사이를 오가는 웃음이었다.
그가 안내한 뚝뚝에 올라탔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빨간색 뚝뚝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가이야'라고 소개했다. 어딘가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 이름이다. 나는 나를 '지아'라고 소개했다. 지아는 여행할 때만 쓰는 영어 이름이다. 예전 전화영어 수업 때 만난 필리핀 선생님이 내 이름 '현지'가 발음하기 어렵다며 '현지'의 '지'를 따서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지아는 나의 두 번째 이름이자 그녀의 첫째 딸 이름이기도 했다. 해리는 그냥 해리였다. 지아와 해리. 가이야는 우리에게 참 기억하기 쉬운 이름들을 가졌다며 칭찬했지만 어쩐지 해리와 나의 이름을 자꾸 바꿔서 불렀다.
그는 아무도 없는 도로 위에서도 과속하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바람의 저항을 받지 않은 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동안 나는 가이야가 스물세 살이라는 것, 형과 여동생이 하나씩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일반 호객꾼이 아니라 한 숙소 사장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너 사장이었어? 대박! 어쩐지 흥정하는데 여유가 넘치더라니."
"그래? 나 여유로워 보였어?"
그는 큰소리로 웃었다. 진심으로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알고 보니 가이야는 속으로 무척 긴장했었다고 했다. 어눌한 영어 발음도 신경 쓰이고, 그보다 더 어눌하게 보일 것이 분명한 어벙한 표정 역시 맘에 걸렸다고 했다. 손님한테 무시당하지는 않을까, 호객 경험이 별로 없어 다른 호객꾼에게 손님을 뺏기지는 않을까 내내 마음이 쓰였다고. 아마 그런 것들에 신경 쓰느라 제일 중요한 가격 흥정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싶었다. 그는 분명 사장님이지만 아직은 돈보다 다른 것이 더 신경 쓰이는 20대 청년이었다. 언젠가 그가 나이가 들어 지금보다 노련한 사장이 되고 나면 그때는 가이야도 다른 호객꾼들처럼 천원 한 장에 목숨 걸고 외국인들과 핏대 세워 싸우는 사람이 될까.
손님은 우리가 유일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럽 출신 여자 여행자가 옆방에 있었는데 우리가 도착하기 직전에 숙소를 떠났다고 했다. 가이야는 어차피 손님도 없으니 우리방에 새 모기장도 달아주고 샤워할 때 쓸 바가지와 슬리퍼도 하나씩 더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일 있을 시기리야 투어도 훨씬 싸게 해줄 테니 자기만 믿으란다. 시기리야는 이 나라 중부지역을 먹여살리는 스리랑카 인기 관광지다. 북인도의 타지마할과 맞먹을 급이랄까. 우리는 가이야에게 투어를 받겠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는 어쩐지 내일 스케줄을 미리 짜고 있었다. 가이야의 능글맞음에 웃음이 피식 터졌다. 그에게는 미움받지 않은 사람 특유의 생기가 있었다.
가이야가 안내한 방은 낡았지만 넓었다. 지은 지 오래된 건물을 렌트한 듯 페인트가 벗겨진 벽면엔 작게 금이 가 있었다. 그래도 벽에 달린 에어컨과 모기장은 꽤 쓸만했다. 우리는 차례로 씻고 나온 뒤 젖은 머리로 모기장 안에 마주 앉았다. 물기가 증발하며 한껏 높아진 체온도 조금씩 날아갔다.
해리는 가족과 통화를 했고 나는 메모리 카드에 있던 사진을 노트북에 옮겼다. 노트북에 옮긴 사진은 외장 하드에 한 번 더 복사했다. 2년 전 백업을 게을리한 죄로 남인도 사진을 3,000장이나 날려먹은 이후, 나에겐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메모리를 이중으로 백업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여행 중엔 마우스도 없고 충전기를 꽂을 콘센트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같은 작업을 했다. 오늘 백업 파일엔 버스 안에서 찍은 우리의 셀카를 담았다. 바람을 맞아 앞머리가 잔뜩 헝클어졌지만 나름대로 봐줄만했다.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이지만 그때의 우리는 빠르게 과거가 되었다.
문득 그동안 해리와 함께 만든 파일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다섯 개. 다섯 번의 밤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여러 순간을 함께 했다. 라면을 나눠먹고, 연애사를 털고, 흥정을 하고, 슬리퍼를 끌며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해리가 떠날 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나와 달리 해리는 귀국일이 정해져 있었다. 그녀와 이별하는 순간을 상상하자 갑자기 가슴에 물이 찼다. 배낭을 메고 '잘 있어요 언니' 하며 돌아서는 뒷모습을 떠올리자 1초 만에 숨에서 쓴 내가 났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며 미리 울렁이는 건 내가 가장 잘하는 짓이자 고쳐야 할 버릇이기도 했다. 나는 애써 도리질 치며 머릿속에 떠오른 영상을 지웠다. 낮춰놓은 체온이 다시 슬금슬금 오르고 있었다.
다음 날, 우리 셋은 다시 뚝뚝에 올랐다. 가이야의 얼렁뚱땅식 영업에 넘어간 것이다. 가이야는 우리에게 시가보다 훨씬 저렴하게 해주는 거라며 원하는 금액을 제시했는데 평균가가 얼마인지 모르는 우리는 그저 알겠다고만 했다. 다른 패키지와 비교해보는 게 귀찮기도 했고, 무엇보다 몇 푼 아끼려 가이야와 얼굴 붉히는 일을 만드는 것도 싫었다. 어쨌거나 우리는 여기서 하루를 더 자야하고 가이야는 우리가 묵는 숙소의 주인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다시 그가 모는 뚝뚝에 앉아 시기리야를 향해 출발했다.
시기리야(Sigiriya)록은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200m 짜리 거대한 돌산이다. 아파트 60층 높이에 해당하는 이 돌산은 윗면에서부터 바닥까지의 경사면이 거의 수직이기 때문에 사실상 산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돌기둥에 가깝다. 5세기 말,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죽인 뒤 왕위를 찬탈한 아들이 있었다. 새 왕은 혹시 형제들이 반역을 일으킬까 두려워 핏줄들을 모조리 말살시키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마는데, 본디 피해 망상 증세가 있었던 왕은 형제들의 보복이 두려워 신하들을 이끌고 시기리야록 정상에 은신한다. 시기리야란 '사자의 암석'이란 뜻인데 이는 왕이 돌기둥 하단을 깎아 사자의 발과 발톱 모양을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왕은 이 시기리야록 정상에 왕국을 건설하고 11년을 살다 세상을 떠난다. 지금 시기리야록 정상에는 당시 화려했던 왕국의 모습은 거의 사라지고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이 남아있다.
해리는 시기리야를 많이 궁금해했다. 그래서 나는 시기리야가 조금도 안 궁금하고 등산을 할 생각은 더더욱 없었음에도 해리를 따라 담불라까지 왔다. 시기리야는 봐도 안 봐도 상관없지만 해리와 헤어지는 건 아직 싫었으니까. 해리는 뚝뚝을 타고 가는 내내 시기리야에 대해 설명했다. 여행 기간이 짧은 이들은 대체로 열정적이다. 이런 사람과 함께 여행 하다 보면 나까지 같이 뜨거워진다. 그래서 나는 해리와의 시간이 조금 버겁고 많이 좋았다.
우리는 시기리야에 대신 시기리야와 똑같이 생긴 반대편 산을 올라가기로 했다. 두 개의 돌산 중 왕국으로 선택받지 못한 채 그저 돌산으로 남아있는 곳이다. 의견은 가이야가 냈다.
"시기리야에 오르면 시기리야를 못 봐. 하지만 반대편을 오르면 시기리야를 정면으로 볼 수 있지."
가이야의 말은 항상 설득력이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자주 그의 말에 넘어갔다.
뚝뚝이 한적한 도로 위를 달렸다.
시기리야가 조금씩 조금씩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