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ep.2 오라이 청년과 지옥 버스

스리랑카의 시간은 40년 느리게 흐른다

by 서현지


Ep.2 오라이 청년과 지옥 버스


엔진 소리가 멎자마자 눈을 떴다. 정신의 절반은 잠들어 있었지만 나머지 절반은 그렇지 않았다. 여행 중엔 절대 긴장을 놓아서는 안 되었다. 낯선 나라에서는 낯설기 때문에 조심해야 하고, 대부분이 것이 익숙해질 때쯤엔 익숙하기 때문에 생기는 느슨함을 경계해야 했다. 여행 4일 차인 해리와 나는 아직까지 전자에 속했다. 푹 잠들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빠진 거 없지?"


해리와 나는 각자 배낭을 둘러멘 채 좌석을 확인했다. 널브러뜨린 것이 없었기 때문에 놓고 갈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랐다. 해리는 고개를 숙여 의자 밑을 확인했고 나는 좌석 사이로 손을 넣어 흘러들어간 것이 없는지 살폈다. 우리의 모양새를 보고 옆자리 외국인 커플도 똑같이 따라 했다. 키가 큰 서양인 남자와 몸집이 작은 동양계 여자였다. 모든 것을 완벽히 챙겼음을 확인한 뒤 우리는 좁은 버스 입구를 통과해 바깥으로 나왔다. 발이 땅에 닿기 무섭게 피부를 감싸고 있던 에어컨 냉기가 빠르게 녹았다.





이방인의 등장에 순식간에 호객 인파가 몰렸다. 까만 얼굴을 한 사람들이 나와 해리와 외국인 커플을 에워쌌다. 왈왈 거리는 높은 목소리에 귓가가 어지러웠다.


"헤이!! 너네 호텔 찾아? 우리 호텔 가자! 싸게 해줄게"

"뚝뚝 탈래 뚝뚝? 어느 쪽으로 갈 건데?"

"버스 갈아타는 거야? 북쪽? 아님 남쪽?"


서양인 남자는 인파가 몰림과 동시에 질색한 표정으로 '우리 예약한 호텔 있어!'라고 빽 소리쳤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남자친구의 등 뒤로 몸을 숨을 숨겼다.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이다. 둘 다 이 상황이 지긋지긋해 보였다. 여행을 시작한 지 오래된 커플임이 분명했다. 호객꾼이 많은 나라에서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빨리 소진된다. 며칠 전까지 인도에 있었던 나는 진심으로 그들의 피로도를 이해했다.


몰려온 스리랑칸들 중 일부는 우리 쪽으로 붙었다. 나는 담불라로 가는 버스를 찾는다고 말했다.


"담불라 버스? 이쪽이야!"

"잠깐, 너네 버스에 에어컨 있어?"

"에어컨? 아니? 없어."

"그럼 싫어. 우린 무조건 에어컨 버스 탈 거야."


단호한 표정으로 꼿꼿이 서 있자 남자가 당황스러운 얼굴을 한 채 말했다.


"야, 여기 에어컨 버스 없어. 봐봐. 담불라 가는 건 다 논AC야."


흥정의 시작은 늘 이런 식이다. 현지 호객꾼들은 일단 무조건 안 되거나 없거나 그 가격으로는 못 한다고 우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의 대부분은 거짓이지만 아주 가끔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도 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오로지 여행자의 몫이다. 경험이 쌓일수록 속을 확률은 줄어들지만 반드시 바가지나 사기를 피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


"에어컨 버스가 없다고? 정말?"


해리와 나는 주위를 살폈다. 하마처럼 크고 못생긴 버스들이 육중한 엔진 소리를 내며 일렬로 서 있었다. 어떤 것은 하늘색이고 또 어떤 것은 빨간색이다. 빨간 버스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공영버스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사설 업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줄지어 있는 버스들은 모두 창문이 활짝 열려 있었는데 어쩐지 에어컨이 있을 만큼 좋은 시설을 갖춘 버스는 한 대도 없어 보였다. 일단 생긴 것부터가 우리가 타고 온 좋은 버스와 전혀 달랐다.


고민하는 동안 배낭은 점점 무거워졌다. 무지막지하게 더운 날이다. 에어컨도 없는 낡고 오래된 버스를 보고 있으니 정신이 아득했다. 깊은 곳에서 불안이 피어올랐다. 해리도 그래 보였다.





그러는 동안 호객꾼의 재촉은 계속되었다.


"너희 지금 당장 안 타면 서서 가야 돼. 그래도 괜찮겠어?"


정말 담불라로 가는 에어컨 버스가 없는지 검색이라도 해볼까 했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그러기엔 이미 호객꾼이 많이 몰렸고 무엇보다도 날이 너무 더웠다. 이것저것 생각하기가 귀찮았다. 판단이 어려울 때는 생각을 멈추고 상황에 떠밀리듯 흘러가버리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호객꾼들과 대화해야 하는 스트레스도 빠른 포기에 한몫을 했다.


"그냥 아무거나 탈까요 언니. 어차피 몇 시간만 더 가면 돼요."


해리의 생각도 비슷했다. 우리의 표정을 살피던 호객꾼의 얼굴이 밝아졌다.





호객꾼의 안내를 따라 하늘색 버스 앞으로 갔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이 버스는 공영버스보다 좀 더 비싼 대신 완충 설비가 되어있어 멀미가 덜 난다고 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빨간 버스보다는 상태가 좋아 보였다. 심호흡을 하고 계단에 발을 디뎠다. 내부에 고여있던 뜨거운 공기가 얼굴로 훅 끼쳤다. 타국 사람들의 몸에서 풍기는 이질적인 냄새와 승객들이 펼쳐놓은 도시락에서 나는 냄새가 뒤섞여 미간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입구에 서 있던 남자가 배낭을 받아 차례로 운전석 옆 빈 공간에 척척 올렸다. 짐을 올리라고 있는 공간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쨌거나 그랬다.

별도로 지정된 자리는 없었다. 먼저 온 순서대로 앉고 싶은 자리에 앉는 시스템이다. 늦게 탄 사람은 목적지까지 서서 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해리와 나는 간발의 차이로 비어있는 두 좌석을 점했는데 우리 다음다음에 탄 스리랑칸은 안타깝게도 선 채로 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얼굴에 짜증이 더덕더덕 흘렀다. 더워죽을 것 같았지만 그를 보며 그나마 앉아서 가는 것에 안도했다. 여행이 거듭될수록 행복의 기준은 점점 느슨해졌고 덕분에 나는 사소한 것에 자주 만족했다.





조금 기다리니 버스 기사가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탔다. 마른 몸에 단단해 보이는 손을 가진 남자였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향에 불을 붙이더니 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렸다. 핸들 앞에는 조그마한 불상이 놓여있었다. 스리랑카 인구의 절반이 불자들임을 실감했다.


"하긴. 기도가 필요하긴 할거야. 이런 버스를 타고도 안 죽으려면."


내 말에 해리가 픽 웃었다. 기도가 끝나고 버스는 출발했다. 최소 십오 년은 됐을 것 같은 낡은 버스는 이대로 전복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였지만 용케 안 뒤집히고 잘 굴러갔다.





정류장을 벗어나자 젊은 청년 하나가 사람들을 헤집으며 요금을 걷기 시작했다. 청년의 한 손에는 현금 다발이, 다른 한 손에는 영수증을 뽑는 기계가 들려있었다. 청년은 승객들을 일일이 붙잡아 목적지를 물었고 그에 맞는 요금을 걷은 뒤 기계에서 영수증을 뽑아 나눠주었다. 영수증은 일종의 차표 역할이었다.


우리도 그에게 담불라로 가는 두 명 분의 요금을 지불했다. 에어컨 버스의 1/3도 안 되는 금액이었다. 버스 안의 열기가 거의 화기에 가까웠지만 그나마 차비가 저렴해 소박하게나마 위안 삼을 수 있었다.


청년은 요금을 걷는 것 말고도 여러 가지 일을 했다. 그는 승객들의 짐을 옮기고, 잡상인을 내쫓고, 자리가 없어 못 앉는 노인을 발견하면 가장 만만해 보이는 젊은이를 설득해 자리를 양보하게 하는 업무도 했다. 버스에는 따로 방송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승객들에게 하차할 정류장을 미리 고지하는 것 역시 그의 임무였다. 여기서 신기한 것은 그가 어떻게 승객들의 목적지를 일일이 외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는 운전을 제외한, 버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업무를 책임졌는데 도저히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일들도 그는 무리 없이 척척해냈다.


청년은 단 한순간도 자리에 앉지 않았다. 아니 그를 위해 마련된 자리는 애초에 없었다. 버스는 출발부터 쭉 문을 열고 달렸는데 청년은 일이 없을 때면 활짝 열려 있는 입구 쪽에 봉을 잡고 서서 위험천만한 자세로 바람을 맞았다. 튼튼한 오른팔과 단단한 악력만이 그를 지키는 유일한 안전장치였다.

나는 그를 보며 1970년대 우리나라에도 존재했다던 '오라이 아가씨'를 떠올렸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아마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스리랑카의 시간은 대한민국보다 40년쯤 느리게 흐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라이 청년의 팔. 버스는 여전히 문을 열어둔 채 산길을 달리고 있다.



버스는 5분마다 가고 서고 가고 서고를 반복했다. 어쩐지 스리랑카인들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도 마음대로 팔을 흔들어 버스를 잡았고 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길가에 버스를 세워 그들을 태웠다. 스리랑카인들에겐 모든 거리와 골목이 정류장이요 승차장이었다. 체계라고는 조금도 찾아보기 힘든 교통 시스템이었지만 오히려 체계가 없는 것이 체계라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버스는 자주 멈췄고 그럴수록 도착시간은 계속 늦어졌다.


나와 해리는 더위에 지쳐 짜증을 내거나 과일을 챙겨 먹거나 갈증이 나 휴게소에 들러 물을 사 마셨다. 그러는 동안 버스는 어쨌거나 조금씩 조금씩 담불라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9b4b5dfe5f34a988-photo-1.jpg 담불라로 가는 버스 안에서






가는 길 2.jpg





스리랑카 여행 TIP


교통비

스리랑카는 교통비가 저렴하다. 6시간 이상 버스를 타야 하는 장거리 버스도 1,500원 정도면 충분하다. 운이 좋다면 에어컨이 달린 사설 버스를 탈 때도 있는데 이럴 경우에는 공영버스보다 평균 1,000~1,500원 정도 더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래봤자 우리나라 동네 버스 가격 수준이기 때문에 전혀 가격 부담이 없다.


식비

기본적으로 랑칸들이 먹는 현지 음식도 1,000원~1,500원 선에서 해결이 가능하고, 주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에서도 3,000원~5,000원으로 한 끼를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현지식 커리는 다소 짜고 매운 편이나, 스리랑칸들이 자주 먹는 '꼬뚜(볶음밥)'는 한국인들 입에도 아주 잘 맞아 아무리 입이 짧은 여행자라도 꼬뚜를 파는 식당만 찾아내면 절대로 배고플 일은 없을 것이다.

더불어 스리랑카 길거리에서 파는 튀김 도넛이나 튀김과자들은 여행 중 입을 즐겁게 하는 좋은 간식거리가 된다. 가격도 저렴하고 열량도 높아 입이 심심할 때 하나씩 사 먹으면 최고다.


But!

스리랑카는 식비와 교통비에 비해 숙박비가 조금 높은 편이다. 인근 국가인 인도는 하루 5,000원~10,000원 내외로 하루 숙박이 가능하지만, 스리랑카는 1인실 기준 평균 20,000원~40,000원 정도는 주어야 괜찮은 컨디션의 숙소를 구할 수가 있다. (물론 도미토리나 조금 낡은 게스트 하우스도 상관없는 여행자라면 이보다 더 경비를 절약할 수 있겠으나 솔직히 말해 위생은 장담하기 힘들다. / 호텔이나 리조트는 100,000원 이상은 주어야 하니 참고할 것.)


Tip. 네이버 환율 계산기에도 없는, 스리랑카 환율 정보

* 미화 1불 = 스리랑카 150루피

* 스리랑카 루피 X 7.6 = 한국 금액 (시기에 따라 다르다)

스리랑카는 '루피'화를 쓴다. 인도 루피와는 다른 화폐이니 헷갈리지 말 것! 참고로 스리랑카는 공항에서 환전하는 게 가장 환율이 좋다. 그러니 한국에서 미화 100불을 가져온 뒤 콜롬보 공항에서 바로 루피화로 환전할 것을 추천한다. (곳곳에 ATM 기계가 많기 때문에 사용할 돈을 몽땅 다 환전해오지는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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