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ep.10
사랑한다 말할 수 없던 그때

열여덟 그때, 나는 너를 사랑했을까

by 서현지

사랑한다 말할 수 없던 그때



테라스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안을 들여다보니 처음 보는 유럽 여자 두 명이 2층 로비로 들어서고 있었다. 키가 큰 여자와 키가 아주 큰 여자였다. 여자들은 내가 테라스에 있는 걸 모르는지 소파에 앉아 떠들기 시작했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언어에 높낮이가 있고 혀끝에서 바람소리가 나는 걸 보아 프랑스 출신일 것 같았다. 의자에 기대 숨을 죽였다. 없는 척할 필요는 없지만 이제 와서 있는 척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수다를 끝낸 그들이 갑자기 입을 맞추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의자에 완전히 기대지도 허리를 세우지도 못한 채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있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나무가 짓눌려 삐걱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셋이 있는 공간에 둘만 있는 그들은 하이랑카에서 가장 조용하다는 2층 로비 앞에서 한동안 조그만 살덩이를 섞었다. 안 보는 건 할 수 있어도 안 듣는 건 어려웠다. 살과 살이 부딪히는 소리는 야하고 축축했고, 나는 그들과 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은 채로 이 자리에 없는 듯 있었다.



살면서 첫사랑 이야기를 할 기회는 의외로 많았다. 나는 강연을 들으러 온 청중에게, 막역한 친구들에게, 그리고 지난 연인들에게 내 처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듣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첫사랑 상대는 시시각각 변했다. 어떨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짝이라고 했다가, 또 어떨 때는 중학교 1학년 때 200일 사귄 남자친구라고 했다가, 또 언제는 고등학생 때 좋아했던 성당 오빠라고도 했다. 민망한 상황을 피하고 싶을수록 나는 가장 오래된 열한 살 적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대중은 실망했지만 남자친구들은 안심했다. 오래된 과거란 그만큼 지루하면서도 안전한 것이니까. 소녀적 이야기에 발끈할 남자는 세상에 없고, 현재와 그때가 멀면 멀수록 긴장감은 가라앉는다. 첫사랑 질문이 마지막 사랑 질문보다 훨씬 예의 있고 단정하게 느껴지는 이유기도 하다.


내 첫사랑 상대는 시시각각 바뀌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나는 11살 때 허OO 라는 남자애를 좋아했고, 14살 때 한XX 이라는 남자친구를 사귄 적이 있으며, 17살 때 문□□ 라는 성당 오빠를 좋아한 게 맞다. 하지만 언제가 '처음'이고 누구를 정말로 '사랑'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그건 사랑의 정의가 모호하기 때문일 것이다. 스타트를 어디서부터 끊어야 할지도 헷갈린다. 정식으로 합의하에 한 교제를 처음으로 쳐야 할지, 짝사랑까지 포함인지, 아니면 10대 때 풋사랑은 다 제치고 성인 때부터 카운팅 하는 게 맞는 건지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남들에게 말할 수 있을만한 첫사랑 상대 1,2,3호를 정해놓고 상황에 따라 골고루 써먹는다.


그렇다면 남들에게 말할 수 없을만한 사람까지 포함시키면 어떨까. 이 항목이 전제된다면 내 첫사랑 상대는 한 명 더 는다. 바로 열여덟 살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첫사랑 4호다. 내 첫사랑 4호는 운동을 잘했다. 달리기도 잘 하고, 핸드볼도 잘 하고, 심지어 담도 잘 넘었다. 나는 이 애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애를 보기 위해 토요일에도 야자를 했고, 긴 머리를 잘랐고, 그 애 반 번호가 20번이었다는 사실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할 만큼 좋아했다. 나는 정말이지 이 애 덕분에 학교가는 게 즐거웠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된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을 정도였다.

담임 선생님은 1년 내내 단 한 번도 자리를 바꾸지 않으셨는데, 덕분에 21번이었던 나는 한 해가 다 가도록 20번이었던 그 아이의 등을 보며 살았다. 다행히 그 아이도 나를 좋아했다. 우리는 쉬는 시간마다 이어폰을 한 쪽씩 나눠끼고 음악을 들었다. 그 애는 아이돌 연습생 제의를 받을 만큼 노래를 곧 잘 불러 시간이 날 때마다 먼데이키즈 노래와 SG워너비 노래를 불러주곤 했다. 그 애의 목소리는 무척 좋았기 때문에 나는 자주 잠이 오거나 잠이 깨곤 했다. 나와 다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듣다보면 어느새 종이 치고 하루가 갔다.

우리는 자주 손도 잡았다. 복도를 걸을 때나 채육 시간에 이동할 때, 혹은 1교시 시작 전 매점으로 뛰어갈 때도 잡았다. 나와 손 잡는 친구는 많았지만 그 애와는 남들이 안 볼 때만 잡았기 때문에 훨씬 특별했다. 우리는 들키면 안 되는 게임이라도 하듯 둘만 하는 행동은 항상 몰래몰래 했다. 남들 모르게 먹고, 몰래 듣고, 또 몰래 만나 몰래 놀았다.


그러던 어느 날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친구가 물었다.

"야, 너네 사귀냐?"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과장되게 펄쩍 뛰며 대답했다.

"미쳤냐? 뭔 그딴 소릴 해."


나는 우리가 사귄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함께 있으면 좋았고, 헤어지기 싫어할 수 있는 한 빨리 만나고 가능한 한 오래 붙어 있었다. 그냥 그뿐이었다. 그 애와 나는 사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고에 다니고 있었고, 그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너무 컸다. 손가락질이 총구보다 무섭던 시절이었다. 나는 여고에 흔히 떠도는 괴담 속 주인공이 되는 게 싫었고 그랬기에 절대로 아니라고 혀끝에 힘을 주어 말했다. '절대'라는 내 말에 그 애의 얼굴이 어떻게 변하는지 보면서도 나는 그랬다.

그날 이후로 나는 그 애를 향한 모든 감각들에 이름표를 붙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애를 좋아했지만 절대로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것이어서는 안 됐다. 그래서 나는 길을 걷거나 밥을 먹을 때도, 함께 이야기를 하거나 하교를 할 때도 우리는 친구라고 속으로 수천 번 되뇌었고, 다른 친구들과 하지 않는 행동은 이 애와도 절대 하지 않았다. 침 삼키는 것도 한 번 의식하는 순간 쭉 신경쓰이는 것 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것들에 정의를 내리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워졌다. 나는 인사도, 대화도 모두 한 템포씩 늦게 했고 그 찰나의 순간엔 어김없이 주변의 눈치를 봤다. 이 애 때문에 학교 오는 걸 좋아했던 나 자신이 이상했고, 무서웠고, 이대로 두면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내가 그러는 동안에도 그 애는 그대로였다. 여전히 노래를 불러줬고,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말했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가고 싶은 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런 모습이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안도했다. 내가 멈춰 서도 너는 여전히 거기 있구나. 다가가지 않아도 이만큼 걸어왔구나. 너는 그런 사람이구나.

우리의 겨울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몰랐을 때다. 내가 가만히 앉아 요만큼도 움직이지 않는 동안, 더 이상 너와 내가 20번과 21번일 수 없는 열아홉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정말로 알지 못하던 때였다.



간식을 먹으러 1층으로 내려왔다. 숙박비를 정산하던 히란이 까딱 눈인사를 한다. 나는 히란을 지나쳐 주방으로 갔다. 주방과 연결된 별관 복도는 오늘도 여전히 소란하다. 공용 욕실에서는 항상 이상한 냄새가 났고, 좁다란 복도에는 각기 국적이 다른 백인들이 웃거나 상대가 웃는 걸 구경하며 웃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우유를 꺼냈다. 대충 시리얼을 챙겨 먹고 타운으로 나가 장을 볼 생각이다. 그러고보니 하이랑카에 온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는데. 이제 슬슬 이동해야할 지역을 알아봐야 할텐데. 배낭을 짊어지고 터를 옮길 생각을 하니 만사가 귀찮아졌다. 우유 뚜껑을 열고 그릇에 부으려는 찰나, 입안에서 바람소리를 내는 여자 두 명이 뒤를 스쳐갔다. 키가 큰 여자와 키가 아주 큰 여자였다. 두 사람은 나를 지나쳐 히란과 인사한 뒤 현관을 나섰다. 가로로 길게 이어진 격자무늬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 애와 나는 열아홉이 되자마자 사귄 적도 없이 헤어졌다. 학년이 바뀌고 반이 갈리자마자 그 애가 하루아침에 나를 외면한 것이다. 그 애는 나를 만나도 눈도 안 맞추고 피해버렸고 전화나 문자를 해도 답장하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여러 날 옆 반을 찾아갔지만 그 애는 끝내 나를 만나 주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울었고 그 애의 교실 쪽으로 자주 기웃거렸다. 정말이지 가슴이 너무 아팠다. 찢기는 것 같다가도 한순간에 쥐어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서늘하거나 뜨겁거나 바람이 불기를 반복했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데 아픈 곳은 왜 가슴인지 신기할 정도였다. 이 정도로 아픈데 왜 퍼렇거나 뻘겋게 멍이 들지 않을까. 이렇게 힘든데도 몸이 정상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고3이라 오래가진 못했다. 20번의 등 뒤만 쳐다보고 있기엔 나는 너무 바빴고, 몇 번의 시험과 여러 번의 대회를 치르는 동안 이미 계절은 성큼성큼 바뀌고 있었다.

졸업식날, 우리는 뻔한 영화처럼 운동장 어느 귀퉁이에서 마주쳤다. 더러워진 교복을 입고, 옆구리에는 졸업장을 든 채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었다.

-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니.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본격적으로 뭔가를 열거나 닫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그 애의 옆을 스쳐갔다. 그리고 이 순간은 내 10대를 통틀어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아직까지도 우리가 무엇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 애와 나는 친구였을까 아니었을까. 하지만 분명한 건 2층 로비까지 숨어들어 몰래 사랑을 나누던 그들을 본 순간, 단박에 내가 그 아이를 떠올렸다는 것이다.

내 인생 어느 것이 '처음'이고 누가 '진짜 사랑'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첫사랑의 정의에 이뤄지지 않은 사랑도 포함된다면. 애매모호한 결말도 괜찮다면. 각자 한 발씩 물러난 겁먹은 관계도 상관없다면. 그렇다면 그 애는 나의 네 번째 첫사랑이 맞지 않을까.


오랜만에 그 애의 이름을 입안으로 불러본다.

울림소리가 많은 그 이름 석 자가 입천장에 뱅뱅 돈다.



하이랑카의 정원. 비어있는 네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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