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ep.10
누구나 하나쯤 품고 사는 이야기

누군가의 과거와 대과거

by 서현지



누구나 하나쯤 품고 사는 이야기



누와라엘리야에 온 지 나흘이 지났다. 나흘 동안 장도 보고, 밥도 먹고, 산책도 하며 많은 것을 해냈지만 궁극적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 건 편하지만 바쁘게 살아온 관성 때문에 가끔은 내가 내 눈치를 본다. 일종의 죄책감이랄까.


방에서는 와이파이가 느렸기 때문에 노트북을 들고 2층 거실로 나왔다. 업체에 보내야 할 원고가 있어 오늘은 죽어도 일을 해야 했다. 테라스에서 담배를 피우던 히란이 꽁초를 끄고 다가왔다. 나는 앉고 그는 서 있었기 때문에 히란은 오늘따라 훌쩍 커 보였다.


그는 내 옆에 앉아 자음과 모음이 동게동게 쌓이는 걸 구경하며 한국어는 글자도 참 예쁘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에서만 5년간 일했지만 어쩐지 일본만큼 한국도 좋아했다. 먹어봤다던 한국 음식도 제법이었고 안녕하세요, 잘 자요, 반가워 정도의 한국말로 거뜬히 했다. 히란은 아시아 소설에도 관심이 많았다. 읽어본 적 없더라도 유명한 작가 이름 몇몇은 댈 줄 알았다. 대부분은 일본 작가였지만 몇몇은 인도 쪽 작가기도 했다. 한국 작가는 모르냐고 물었더니 빙글 웃으며 '너' 라고 대답했다. 나는 히란의 타고난 센스에 자주 감탄했다. 아마 살면서 그를 이만큼 살찌운 건 순간순간 발휘되는 순발력과 재치가 아니었을까. 모니터에 빼곡히 채워지는 문장을 보며, 히란은 언젠가 한글 자모음을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히란, 너는 왜 일본에 갔었어?"


문득 궁금해졌다. 본래 회계사였던 히란이 왜 그 먼 섬나라까지 가야했는지. 자세히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는 스리랑카에서도 회계일을 했고, 일본에서도 그 비슷한 일을 했다고 들었다. 히란은 돈 때문에 일본에 갔었다고 대답했다. 이혼 후 아내에게 대부분의 재산을 주었고, 빈털터리가 된 채 오갈 곳 없어졌을 때 한 일본인을 만나 함께 도쿄로 갔다고. 나는 히란이 이혼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애초에 결혼한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알지만 몰랐기 때문에 나는 그가 쏟아내는 모든 말에 놀랐다.


"다 지난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 힘들었어."


히란은 쫓기듯 일본으로 출국했던 그 순간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시간'이라 표현하면서도 내가 더 묻지 않은 지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과거로부터 출발했다.



히란은 스리랑카 '번다르엘라'에서 태어났다. 평범하게 자라 평범한 학교를 졸업했고, 운 좋게 젊은 나이에 회계사 사무실에 취직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돈을 벌었기 때문에 그는 열심히 일했다. 당시 회사에 히란보다 어린 남자는 없었고, 그는 돈도 없고 든든한 빽도 없었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하고 시키지 않는 일도 했다. 당시 사무실에는 예쁜 여직원이 하나 있었다. 그 여직원은 어마어마하게 예뻤기 때문에 남자 직원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히란 역시 그 여직원을 좋아했지만 섣불리 고백할 수 없었다. 그는 어렸고 가진 게 없었으며 그랬기 때문에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 질 나쁘기로 소문난 남자 하나가 그녀에게 본격적으로 추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자가 부담스러웠지만 회계사였고 상사였기 때문에 단호하게 거절할 수 없었다. 그와 문제가 생기면 잘리는 것은 결국 사무보조인 본인일 것이었다. 여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괴로운 마음으로 회사 생활을 하다, 어느 날 우연히 야근을 하던 히란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히란은 회사에서 그녀와 나이 차가 제일 적게 나던 직원이었다. 그녀는 히란 앞에서 서글프게 울었고, 그는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으며 그녀를 달랬다. 히란의 인생에 찾아온 첫 번째 기회였다.


"그래서. 그걸 계기로 호로록 사귀셨나?"

"당연하지. 그 기회를 못 잡으면 그게 남자야?"

"참나. 아무튼, 그 여자분이 바로 전 부인?"

"맞아."


두 사람은 그날을 기점으로 급속도로 가까워지다 끝내 연인으로 발전했다. 회사에는 밝힐 수 없었다. 스리랑카는 보수적이었고, 공개연애한 커플이 결혼까지 가지 않으면 부정한 여자라 손가락질을 받았다. 히란은 회사에서, 또 회사 밖에서 그녀와 비밀 연애를 이어갔다. 아슬아슬했지만 몰래 하는 사랑은 짜릿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스리랑카에 큰 이슈가 생겼다. 스리랑카에서 실력 좋기로 유명한 영화감독이 새로 들어갈 작품의 여주인공을 일반인 중에 뽑겠다고 공표한 것이다. 여주인공은 매스컴을 탄 적 없는 완벽한 뉴페이스여야 하며, 어려야 했고, 반드시 예뻐야 했다. 그녀는 오디션에 참가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어리고 예뻤지만 카메라 앞에는 한 번도 서본 적 없는 쑥맥이었다. 대사를 외우고 모르는 사람 앞에서 연기를 할 자신이 없었다. 이때 그녀를 응원한 것은 히란이었다. 부모도 반대했던 일을 오로지 히란만 응원했다. 히란은 그녀와 함께 원서를 썼고,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진행된 모든 오디션에 동행했다. 히란은 낮에는 회사에서 회계일을 했고 저녁에는 그녀의 연기 연습을 도왔다. 피곤했지만 그녀가 행복해하니 힘든줄도 몰랐다. 오디션은 몇 개월에 걸쳐 계속 됐고, 결국 순박한 시골 처녀였던 그녀는 천문학적인 경쟁률을 뚫고 새 영화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됐다. 스리랑카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캐스팅이었다.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녀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전국 어디를 가든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티비, 라디오, 모든 매체에 그녀가 등장했다. 그녀는 회계사 사무실 보조 직원에서 하루아침에 스리랑카를 휘어잡는 여배우가 되었고 히란은 행복해하는 그녀 옆에서 함께 기뻐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결국 비밀리에 감춰왔던 히란과의 관계 역시 탄로 나고 말았다. 그녀가 차기작을 채 고르기도 전의 일이었다. 온 매스컴에 히란과 그녀의 데이트 사진이 대문짝만 하게 도보됐다. 언론에서는 히란이 재벌 2세다, 젊은 사업가다, 스폰서다 제멋대로 떠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그녀를 결혼도 하기 전에 남자와 밤늦게 데이트를 즐긴 부정한 여자로 내몰기 시작했다. 히란의 사무실에도 기자들이 들이닥쳤다. 히란은 그녀와 연인 관계라고 사실대로 말했지만 그건 언론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들은 더욱 자극적인 것을 원했다. 사람들은 그녀가 갑자기 스타가 된 데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추측했고, 소문의 배후에는 어김없이 의문의 남자 히란이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그녀를 둘러싼 루머를 잠재우기 위해 결혼을 강행했다. 결혼을 하기는 일렀지만 그것만이 그녀를 더러운 추문에서 벗어나게 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급하게 한 결혼이었지만 두 사람은 행복했다. 예쁜 딸아이도 생겼고 작지만 두 사람만의 집도 생겼다. 하지만 배우로서의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는 차기작 흥행에 줄줄이 실패했고 일각에서는 그녀가 결혼을 하며 더 이상 스폰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영화가 실패한 것이라며 억측했다. 그녀를 축복하는 팬들도 있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그녀를 데뷔시킨 오디션에 검은 배후가 있었을 것이라 믿었다. 루머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결혼했지만 한번 무너진 이미지는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었다. 그녀는 영원히 히란의 그늘에 있었다.

그녀는 우는 날이 잦았다. 가정도, 아이도, 일도, 자기 자신도 돌보지 않았다. 우울감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활동을 해보려고 해도 이미 전국에 얼굴이 알려져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건 히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두 사람은 싸우기 시작했다. 모두에게 잘못이 없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탓했다. 그들은 마음의 병을 얻었고,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 역시 함께 불행했다. 지옥 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끝이 보이는 길 위에서 두 사람은 오래 방황했다.



"뭐, 이런 이유로 이혼을 하게 된 거지."

"참 대단했네 너네 나라 언론도. 그래서, 지금은 좀 괜찮아?"

"그럼 괜찮지. 그때가 언젠데."

"언젠데?"

"한 이십 년 전?"


크게 놀랐다. 이십 년 전이라니. 그러면 그가 지금 몇 살이란 말인가.


"잠깐 히란. 너 대체 몇 살이니?"

"나? 나 마흔일곱."

"뭐?!"


히란은 기껏해야 30대 초반의 얼굴을 하고선 씩 웃었다. 또래인 줄 알았던 그가 내 인생의 절반을 더 살았다니.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그는 '랑칸들이 좀 젊게 살지'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이갓. 오리엔탈 블러드 파워란 바로 이런 거구나.



이혼 직후 그녀는 영국으로 떠났다. 딸아이는 그녀가 키우기로 했다. 히란은 양육비 명목으로 재산의 대부분을 그녀에게 주었고, 그녀는 타국으로 떠난 뒤 단 한 번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히란은 그녀와 헤어진 후 크게 방황하다 회사에 취직했지만 회사가 도산해 다시 빈털터리가 되었고, 삶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했을 때 한 일본인 사업가를 만나 그와 함께 도쿄로 건너갔다고 했다. 히란 인생에 찾아온 두 번째 기회였다.


일본에서의 삶은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배웠다. 돈 없고 말 못 하는 유색인종을 품을 만큼 일본 사회는 자애롭지 못했고, 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히란은 최선을 다했다. 힘들었지만 고생한 만큼 소득이 있었다. 그는 일본어를 빠르게 익혔고, 회계사로서 인정받아 노력한 것 이상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실력을 인정받는 건 행복했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노력하는 족족 돈으로 보상받는 기쁨이었다. 스리랑카에서는 한 달을 꼬박 일해도 30만 원을 겨우 벌었지만 일본에서는 그보다 적게 일해도 몇 배를 벌었다. 말도 트이고 돈도 모이자 몇 년 후에는 일본인 친구들도 생겼다. 히란은 그들과 맛있는 것도 사 먹고 근교로 여행도 다니며 도쿄 라이프를 즐겼다. 한국 사람을 접해본 것도, 한국 음식을 알게 된 것도 모두 도쿄에서였다. 히란은 이혼의 아픔과 일생일대의 위기를 노동의 기쁨과 돈 버는 재미로 이겨냈다. 그는 그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일본인들 속에서 실력도 키웠고 통장도 키웠다. 도톰해지는 지갑만큼 가슴에도 새 살이 돋았고, 그렇게 5년 후 히란은 비로소 스리랑카로 돌아올 준비를 마쳤다.


"나 돈 버는 게 그렇게 재미있는 줄 몰랐잖아. 덕분에 지금은 새 가정도 꾸렸고 말야."


히란은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만 결국 자신을 밑바닥에서 건져올린 건 돈이었다며, 자신에게 돈을 벌 수 있는 재능과 기회가 있었던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웃었다. 나는 돈 얘기 말고도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만두었다. 서사의 주인공이 이 이야기의 끝을 대충 이렇게 마무리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그가 어깨를 톡 치고 일어났다.


"그럼, 열심히 써. 나는 이만."


히란이 앉아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과거와 대과거가 소파에 남은 엉덩이 자국처럼 가슴에 동그랗게 남았다. 나는 모니터를 쳐다보다 정작 써야 할 칼럼 파일을 끄고,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인 글을 써 내려갔다. 잊기 전에 기록해두고 싶은 이야기였다.





* 본 이야기는 본인의 동의 하에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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